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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롱팰롱 Nov 12. 2020

엄마의 김치국밥

나의 소울 푸드

엄마가 우리 집에 온 것은 내가 중학생 때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때가 나는 기억이 잘 나진 않는다. 누군가는 내 인생에 일어난 큰 사건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정확히 내가 몇 살 때 어느 계절에 엄마가 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그때 나는 내 인생이 폭풍같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고 가끔 생각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 낳아주신 엄마가 돌아가시고 거의 꼬박 삼 년을 아무도 몰래 밤마다 울었다. 낳아주신 엄마가 그리운 만큼 엄마의 빈자리는 커져갔다. 엄마가 오랜 기간 아팠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응석조차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던 나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내 응석을 받아 줄 수 있고 관심을 쏟아주는 어떤 존재가 필요했다. 나는 나의 첫 생리도 사촌언니가 알려주어서야, 밤마다 너무 아픈 성장통도 큰엄마가 지나가는 말로 사촌언니 이야기를 할 때서야 이게 그거구나 하고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요즘 말로 쎈캐다. 회사에서도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언성 높여 맞서 싸웠고 그런 식으로 나를 가르치며 키웠다. 그런 엄마가 처음 왔을 땐 내가 상상한 엄마와 무척 달랐다. 음식도 잘할 줄 몰랐고 내가 생각했던 인자한 어머니 상과는 거리가 많이 달랐다. 그 와중에 나를 제일 힘들게 했던 건 아빠와의 잦은 다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도 엄마도 젊었고 만남부터 결혼까지 번갯불에 콩 볶 듯 진행됐으니 당연한 수순이었겠지만, 엄마를 잃고 사춘기를 겪던 나는 그 틈바구니에서 매일을 나 좀 보라고 속으로 절규하며 지냈다. 하지만 내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나는 겉으로는 그런 내색 하나 없이 평온했고 엉망이던 성적도 3학년쯤부터는 단순히 실업계는 가기 싫다는 생각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상위권을 앞다투는 성적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부모님도 별 걱정은 없었던 것 같다. 나 자신도, 내 부모님도 그 누구도 내 속이 다 곪아 터져 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엄마의 쎈캐가 나에게 그다지 문제 되진 않았다. 생각보다 달랐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엄마가 아니야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보다 나는 아빠가 무척 미웠다. 왜 우리까지 보듬으려고 들어온 여자를 저렇게 내몰아 붙이는지 죽도록 미웠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 겉으로는 평온했다. 한 번도 아빠는 왜 엄마를 그렇게 대하냐고 묻지 못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싸움이 모두 아빠의 잘못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8할은 아빠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빠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그렇지만 늘 그렇게 평온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점점 변해 갔고 20대에 들어서 대형 사고를 치면서 부모님과 연을 끊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바로 부모님이 사는 바로 옆 동네에서 술과 담배에 절어서 밤낮 바뀌어 미래도 없이 살면서 말썽을 부렸고, 그런 딸을 알면서도 부모님도 조심스러워 선뜻 먼저 다가올 순 없었다. 우리는 오랜 기간 연락을 끊고 지내다 보니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내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새엄마였다. 처음 엄마가 날 보자고 해서 만나러 갔던 날이 기억난다. 무척 긴장했고 엄마가 도대체 나한테 무슨 소리를 할지 나는 무척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런 엄마는 나와줘서 고맙다며 나를 보듬었다. 돈에 예민한 아빠를 구슬려 미래도 없이 20대 후반이 되도록 여권도 없이 살던 나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가서 큰 세상을 보여준 것도 엄마였다. 내가 호주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도, 캐나다에서 유학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다 큰 딸을 아낌없이, 반대하는 아빠를 오히려 설득해서 보낸 것도 엄마였다.


내가 20대 초반이었을 때였다. 누군가가 나에게 아프면 어떤 음식이 먹고 싶느냐는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주저 없이 "전 전복죽 먹어야 해요! 전복죽 먹으면 싹 낫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왜 전복죽이었을까. 그때는 단순히 전복이 보양식이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면에 부러움과 질투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몇 해 전이었다.

캐나다에서 유학을 하면서 몸이 무척 안 좋은 어느 날이었는데, 엄마가 만들어 준 김치국밥이 무척 먹고 싶었다. 몸이 안 좋다고 하면 걱정할까 봐 대충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어떻게 만드는 지 찾아 만들었다. 똑같을 순 없었지만 제법 비슷한 맛이 났고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나니 나는 비로소 영혼이 채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 문득 궁금했다. 왜 나는 그때 전복죽이었을까.

아주 오래전 내가 학생이던 때 사촌동생이 부리던 응석이 불현듯 떠올랐다. 큰집에서 귀한 아들로 태어나 다른 자식들은 못해 먹여도 막내아들만큼은 먹고 싶다는 것을 다 해 먹였다. 어느 날 큰집에 있는데 몸이 아픈 사촌동생이 징징 거리자 큰엄마는 뭐 먹고 싶냐고 엄마가 다 해주마라며 어르고 달래자 전복죽을 해달라고 응석을 부렸다. 그 당시만 해도 전복이 무척 귀했는데 전복죽 자체보다 그런 음식을 서슴없이 말하며 먹고 싶다고 부렸던 그 응석이, 어린 내 마음에  무척 부러웠었던 것 같다. 이후로 나에게는 전복죽이 엄마의 사랑이자 응석의 대명사가 되었던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세상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해 주는 엄마가 있고, 내 엄마가 큰엄마가 그런 것처럼 응석도 다 받아주고 어르고 달래고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자신이 낳은 자식도 아닌 자식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주고 걱정해 주고 뼈 속 깊이 보듬어 주는 내 엄마의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였다. 그런 엄마의 시그니처 푸드인 김치국밥이 내 영혼의 음식이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요 며칠 힘든 날들을 보내다 보니 기력이 떨어져 가는 느낌이 든다. 내일은 나의 소울푸드이자 엄마의 시그니처 푸드인 김치국밥을 해서 엄마의 사랑을 느끼며 기력을 회복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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