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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팰롱팰롱 Mar 31. 2021

할머니의 핫팩 똑딱이

#stopasianhate

아시안 증오가 점점 심해지면서 사망자나 부상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고 있다. 단지 피부색 때문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폭력을 겪어야 하고 목숨까지 잃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 화도 나고 공포스럽기도 하다. 나는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나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정쩡하니 이 사회를 겉도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한 번도 지운 적이 없다. 

캐나다에서도 코로나바이러스가 심각해지면서 작년 이맘때쯤 많은 이들이 겪었듯 나도 일시 해고를 당했다. 사전에 회사와 이야기가 다 되었고, 어느 날 출근길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이 와서, 곧장 식료품점으로 향했다. 앞으로 한 달은 거뜬히 날 수 있을 정도로 식료품을 쟁여둔 덕에 한동안 외출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가끔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내가 알던 그 거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스산했다. 집에 갇혀 하릴없이 지내다 보니 자연스레 코로나 관련 뉴스에 귀 기울였고 그러다 보니 아시안을 향한 증오 범죄 혹은 인종차별 뉴스나 영상에도 유독 눈이 갔다. 시간은 흘러 냉장고 속이 어느덧 텅텅 비어 다시 식료품점으로 향해야 했다. 하지만 인종차별 영상들이 이미 머릿속에 박힌 뒤라 덜컥 겁이 났다. ‘사람들이 내가 바이러스라고 공격하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을 앞세우며 길을 나섰다. 길거리는 무척 조용해서 마치 사람들이 다 떠나고 없는 도시를 걷는 그런 약간의 세기말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길 건너편에 어떤 백인 할머니가 걷고 계셨다.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면서 그분을 쳐다봤는데, 그분이 날 발견하시고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그때 마치 어릴 적 핫팩 속 단추를 똑딱하고 누르면 따뜻함이 퍼져 나가듯 냉기만 돌던 내 마음속 핫팩도 순식간에 똑딱하며 내 마음을 덥혀 주었다. 

캐나다는 비교적 인종차별이 없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조금만 유심히 들춰보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황들과 종종 맞닥뜨리게 된다. 인종차별을 대놓고 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 혹은 영어 우월주의(혹은 “네이티브” 악센트)에 사로잡힌 무지한 사람들도 무척 많다. 정작 말하는 자신은 친절을 베푼다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인종차별 혹은 백인 우월주의에서 근거한 것이라는 것도 모르는 치들이다. 친한 관계면 한마디 할 수도 있겠지만 어정쩡한 관계이거나 직장 동료나 상사일 경우엔 어색한 분위기를 감수하고서라도 한마디를 해야 할지, 그냥 넘어가야 할지 고민될 때가 있다. 

앤지 토머스의 <The Hate U Give>에는 한 백인 아이가 어쩌다 보니 흑인 아이들과 어울려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는 가운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백인 아이가 한 흑인 아이한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왜 흑인들은 이름을 평범하게 쓰지 못하고 꼭 De로 시작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 흑인 아이가 이름을 De로 시작하는 것은 흑인들 사이에서는 평범한 일인데 왜 평범하지 않다고 하느냐고 반문한다. 어쩌면 평범이라는 단어는 인간을 설명하는 말로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제각각 특별한 존재들이며 각기 특별한 존재들이 모였기 때문에 우리 사회는 다양한 빛깔로 아름답게 빛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부 색깔에, 그리고 어떤 언어를 쓰는지에 상관없이 한 인간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 그 핫팩 속 똑딱이와 같던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만이 필요할 뿐이다. 언젠가 모든 인간이 인종으로 분류되지 않고 인류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묶여 평등하게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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