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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잭슨파이브 Aug 30. 2015

공대 남자 사람과 떠나는 그림이야기

영화 속 그림 이야기 - '우먼 인 골드'

 '잭슨 파이브'입니다.     림의   . 사실 그림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는 소식에 이 영화를 보았지만, 이 영화를 관통하는 내용은 그림만이 아닌 과거 과오의 인정과 그 의미 또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70여 년 전까지 일본에게 지배를 당했던 우리 대한민국의 과거와도 맞닿아있다고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꼭 이 영화를 감상할 것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영화 속 그림과  함께하는 여정을 따라가시면 어느덧 큰 감동을 느끼는 본인의 모습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Anyway,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면 영화의 소재로 쓰인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이라는 작품입니다. 화려한 예술가의 상징으로 불리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인 만큼 특유의 아름다움을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에로틱' '화려함' '여자' 성공적 - 구스타프 클림트


그림 한 점을 보기 전에 아주 간단하게 클림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평생 화려한 삶을 살았던 화가입니다. 작품의 찬/반 논란은 언제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기도 하였지만, 인지도와 명성은 그를 부유한 예술가로서 말년까지 화려한 무대의 중심으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그림은 언제나 '에로틱' 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그림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의 그림에서는 에로틱이라는 단어를 지울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다나에' '키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1900년 초 유럽 메이저 예술층은 그의 그림이 지나치게 퇴폐적이라며 비난을 가합니다. 하지만, 에로틱하였지만, 아름다웠던 그의 그림 덕분에 그는 언제나 대중의 사랑을 받았고 예술가로는 드물게 수많은 후원으로 부유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화려함'은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오히려, 금박을 입히거나 다채로운 색상을 표현하여 아름다움이 지나친 화려함에 묻히는 모습도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클림트의 그림은 화려하고 아름다울 그 뿐 그 이상을 주지는  못한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그의 작품에서 자유분방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보수적이며 정형적인 틀에 갇혀있던 예술계 시절의 예술가로서 그의 저항과 반발심이 지나친 화려함으로 표현되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언제나 그의 곁에는 '여자'가 많았습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여자들의 그림은 언제나 그의 스캔들로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 실제로 그가 죽고 난 후에는 친자소송과 그림의 소유권 주장 등 법정 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실제로 'SEX'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의 쾌락이라고 생각하였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다 간 자유분방한 예술가였습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부인의 초상'의 여정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구스타프 클림트, 1907년 작, 뉴욕 누 갤러리>


그림의 이름과 같이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반복되는 이름에는 짧게 아델레라 부르겠습니다)은 오스테리아의 부유한 유대계 금융인의 상속인으로 구스타프 클림의 최대 후원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실제로 이 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에게 돈을 지불하여 그려진 아델레의 초상으로 그녀의 집에 걸려 있었습니다. 다만, 그녀 사후에 세계 2차 대전의 포화와 함께 시작된 유대인의 탄압으로 그림도 몰수되어 나치의 개인 소장품으로 존재하였습니다. 그리고 전쟁 후에는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불리며 국립미술관의 상징으로 불렸습니다.


이 그림을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는 이 후부터 벌어집니다. 아델레의 그림은 그녀의 남편이 돈을 지불하여 그려진 초상(아델레의 초상이지만, 소유권은 아델레의 남편)이었고 아델레의 남편은 죽기 전 전재산을 자신의 조카에게 남긴다는 유언장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유언장의 주인공인 조카 마리아 알트만(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빅토리아 블로흐)은 이 그림을 반환받기 위한 세기의 소송을 17년간 진행하게 되고 70여 년 만에 다시 그림을 되찾게 됩니다. 





예술, 가격만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1,700억 원의 그림자 


자본주의는 그림마저 돈으로 가치를 매기기 시작합니다. 신문에 가끔씩 지면을 차지하는 세계 최고그림 판매액 경신이라는 기사를 볼 때마다 느껴지는 생각은 '예술은 결코 금액으로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입니다.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며 나온 작품들이 현재 얼마?로 매겨지는 모습을 본다면 실상 얼마나 허탈스러울까요? 


그리고 그림의 가격에는 국가적인 음모도 존재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최고가의 영광(1,900억 원 상당)을 가지고 있었던 잭슨 폴락의 <No 5,  1948>이라는 작품은 미국의 미술계 발전 정책에 의해 철저하게 띄워져 무려 1,900억 원이라는 금액에 팔리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아직도 잭슨 폴락의 추상화가 1,900억 원이라는 가격에 걸맞은 느낌을 주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있다면 예술이 이미 자본주의라는 울타리 안으로 끊임없이 넘어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Anyway,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유명한 화장품 기업인 에스티로더의 창업자 상속자에게 무려 1,700억 원이라는 거금에 팔리게 됩니다. '공공의 사람들이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해둘 것'이라는 판매자의 조건과 말이죠. 그리고 그렇게 뉴욕의 누 갤러리에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부인은 젊은 모습 그대로 후대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영화의 스포는 막아야  해!"라는 저의 신념으로 영화의 자세한 내용은 담지 않았습니다. 다만, 클림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담아 그림을 어떤 느낌으로 봐야 할지는 어느 정도 힌트를 드린 듯합니다. 그리고 그림의 느낌, 표현방식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담아드리려 했지만, 이번 편은 슬쩍 넘어가려 합니다. 종종, 예술은 누군가로부터 듣는 이야기보다 본인의 눈으로 담아내는 느낌이 더 좋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담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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