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있는 선배와 통화했습니다. 두 달 넘게 네 식구가 집에 있다 했더니 “세 끼 해 먹이려면 힘들지 않냐?” 묻더군요. 힘들다기보다는, 음, 바쁘죠, 바쁩니다. 한데 바쁘면 라면도 끓이고 냉동만두도 사다 쪄 먹입니다(구우면 설거지가 번거롭다보니). 그러다 조금 미안해지면 감자와 달걀 삶아 소금 종지와 함께 디밀기도 하고 아, 정말 미안해지면 고사리, 시금치 나물을 무치기도 합니다. 힘들다(또는 힘들 것 같다)는 말은 시작하지 않은 채 지켜보는 자, 또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니 단점이 보이더군요. 고쳐줄 점, 혼내서라도 못하게 해야 할 행동, 북돋워줘야 할 성정 투성인 겁니다. 장점이라곤 억지로라도 눕혀 놓으면 잠드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것 뿐? 네, 다 압니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악의가 없으면 혼내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제 스스로 확 끓어오를 때는 잠시 시간을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아는데, 뻔한 변명, “그게 잘 안 됩디다.” 거기에 방구석 먼지처럼 따라 붙는 반성 모드는 지겹고 다신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은 일기 마무리용 거짓말이며 미안하다는 고백은 면피잖아요.
거리의 문제, 생각해보니 저와 아이들 사이 ‘거리’는 참 독특합디다. 사회적 거리 1.5미터처럼 재단할 수는 물론 없어요. 스무 살, 뜨거울 때 만난 연인과의 거리처럼 the closer, the better도 아니고요, 함께 살 만큼 산 부부의 침대 위 거리처럼 암묵 합의도 안돼, 수틀리면 달아나는 ‘안 봐도 그만’ 또한 안된다고요. 다만 가까워야 할 때 멀리 두거나 조금 떨어뜨려야 할 때 너무 달려들면 제게나 아이에게나 상처로 남는다는 건 확실해요. 어느 부모도 언제 얼마나 다가서야 하는지, 물러나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이 안타깝죠.
오늘 실은 둘째를 혼냈어요.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했거든요. 바로 어제 같은 이유로 타이른 뒤라 깜깜한 밤 촛불에 비친 손그림자처럼 묵직하게 으르렁거렸죠. 오늘의 거리는 그 정도여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다음 문장은 예상할 수 있을 거에요. 제가 틀렸어요. 오늘이야말로 아이에게 더 가까이 마당으로 날아드는 민들레 홀씨와 같이 사뿐히 다가서야 했어요.
이렇게 써도 여전히 모를 거에요. 늘 뒷북만 치겠죠. ‘그래서는 안 됐어, 왜 그랬을까?’라고 쓸 거에요. 그래도 계속 쓰려고요. 중학생 반성문이든 하나마나 한 다짐이든 면피용 감상이든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쓸 거에요. 그러다 보면 아이들과의 거리 두기 기술이 카메라 렌즈 초점 맞춰 들어가듯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