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그말리온 효과, 타인의 기대나 관심으로 인하여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 다시 말해 내 아이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면 스스로 정말 잘하기를 원하여 잘하게 되는 마법. 반세기 전 하버드 대학 로젠탈 씨가 어느 초등학교 아이들 20%에게 8개월 동안 끈질기게 ‘너희는 잘할 수 있다’고 암시한 결과 간택된 아이들의 학습 의지와 능력, 지능 따위가 나머지 80%보다 높아졌다 하여 붙은 또 다른 이름, 로젠탈 효과.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키프로스 섬의 조각가입니다. 섬나라의 왕이었다는 해석도 있으나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피그말리온은 귀한 상아로 여인상 갈라테이아(1)를 조각하죠. 방탕하고 문란한 키프로스 여인들에게 질린 피그말리온은 스스로 조각한 여인상에게 마치 실재하는 이상형을 대하듯 사랑을 쏟아붓더니 마침내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청하기에 이릅니다. “제가 빚은 이 여인과 꼭 빼닮은 사람을 제 아내로 맞이하게 도와주세요”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신부를 찾는 대신 한 술 더 떠 조각상 여인을 아예 사람으로 만들어 피그말리온에게 선물합니다. 피그말리온의 속마음까지 읽은 여신의 아름답고 극적인 이야기이자 피그말리온 효과, 로젠탈 효과, ‘원하니 이루어졌던’ 2002년 월드컵 필승 코리아의 원전입니다.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에도 피그말리온 장가보내기 일화가 나옵니다. 다만 이에 이르기 위해서는 키프로스 섬 여인 이야기를 거쳐야 하죠. 키프로스 여인들의 방탕과 문란은 타고난 성정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로디테(오비디우스가 로마 시인인지라 원전 표기는 아프로디테의 로마식 명명인 베누스, 즉 비너스)가 자신을 숭배하기 거부한 죄를 물어 여인들을 수치심 한 올 없는 매춘부들로 전락시켜버린 것이죠. 그러고 보면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 사랑을 느낀 건 삐친 아프로디테가 고립된 섬, 키프로스의 여인 모두에게 저주를 내린 탓에 애당초 신붓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 아닐까요? 삐딱하게 보면 피그말리온은 아프로디테의 설계에 걸려든 셈이라 볼 수도 있겠군요. 이렇게 보니 그리 아름답고 성스러운 유래는 아닙니다. 게다가,
돌덩이에 불과했다가 생명을 얻은 갈라테이아에게 아프로디테도 피그말리온도 “피그말리온을 사랑하시오?”라 물은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교육이 온전히 집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친구들과 뛰어놀지도 못하고 아이패드로 온라인 수업을 받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으뜸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들을 제 입맛대로, 제가 원하는 아이들의 모습대로 설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이기도 합니다. 집안일을 돕는 아들, 책을 좀 더 많이 읽는 딸, 경쟁 환경이 아니라도 스스로 열심히 공부하는 아들, 제 방 정리만큼은 할 줄 아는 딸, 이런 아들, 그런 딸. 늘어놓자면 끝도 없습니다. 무려 하버드 대학 선생님이 검증한 든든한 이론도 있겠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기간 동안 마음먹고 몰아볼까 싶기도 했습니다. 한데 두 달을 함께 있어보니 설계에 앞서 필요한 것이 보입니다. 지켜보는 일, 아이들의 하루를, 아이들의 순간들을 지켜보는 일, 칭찬과 격려를 보낼 행동을 나로부터가 아니라 아이들로부터 찾아내는 일, 오히려 학교에 가지 않아 함께 있는 이 기간은 설계하기보다 관찰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절이겠더군요. 이런 때가 언제 또 오겠어요. 곧 저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훨씬 더 길어질 텐데요.
구병모의 소설 가운데 ‘피그말리온 아이들’이 있습니다. 청소년 소설로 분류된(대체 이런 분류는 누가 할까요? 읽으면 오히려 청소년 금서에 가깝습니다) 이 소설은 특히 작금의 몸 사림 시절에, 혹시 미성년의 아이들이 있는 이들이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맨 뒷장,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면 아이들 방으로 살며시 내려가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지도 몰라요. 그 밤에는 잠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요. 그러하기에 딱 좋은 시절이에요.
(1)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은 신화 원전에 나오지는 않습니다.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펼친 18세기 예술가들이 쓰기 시작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