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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May 01. 2020

알아요?

아내 베개 모양을 아나요? 뒤척이는 습관까지 기억한다는 비싼 놈인지, 양쪽 귀퉁이 쥐고 여차하면 날 내려칠 용도의 솜뭉치인지, 잠 못 드는 여름밤, 모로 누워 아침 드라마 재방송 볼 때 쓸 법한 원통형 왕겨 베개인지 알아요?


달걀을 손에 쥐고 있어요. 프라이를 할까요, 삶을까요? 딸은 무얼 더 좋아하나요? 젓가락질이 서툰 딸에게 흰자를 발라줘야 할까요, 노른자를 꺼내 줘야 할까요? 딸이 자르고 붙이고 만들 때 하는 혼잣말을 들어봤나요? 혹시 알아요?


오늘 아들이 어떤 옷을 입고 학교에 갔는지 아나요? 빨아놓기 무섭게 꺼내 입는 축구복은 여러 팀 가운데 어느 팀 것인지 알아요? 아들 방 책장에 꽂힌 전집들의 1권이 왼쪽부터 시작하는지 오른쪽부터 시작하는지 기억해요?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당장은 떠오르지 않아도 기억을 더듬으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차 싶다면 지금이라도 살펴볼 의지가 생길 거예요.


질문을, 바꿔, 볼게요.


엄마 베개 모양을 아나요? 뒤척이는 습관까지 기억한다는 비싼 놈인지, 양쪽 귀퉁이가 해진 솜뭉치인지, 시도 때도 없이 오지 않는 잠을 부르기 위해 이리저리 뒤척이며 아침 드라마 재방송 볼 때 쓰는 원통형 왕겨 베개인지 알아요?


고기를 살까요, 생선을 살까요? 아빠는 무얼 더 좋아하나요? 아빠 치아는 갈빗대를 아직 뜯을 만큼은 될 거예요, 그렇죠? 아빠가 뉴스를 볼 때 하는 혼잣말을 들어봤나요? 혼잣말이긴 할 거예요, 그렇죠? 혹시 알아요?


오늘 엄마, 아빠를 봤나요? 아빠 가르마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기억하나요? 분명히 머리 한 지 오래되었을 엄마가 정리 안 된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손이 왼손인지 오른손인지는요? 아빠가 언제 전기면도기를 분해 소지할까요? 엄마, 아빠가 자주 꺼내 보는 옛날 앨범은 어느 책장에 꽂혀 있을까요?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다만 머릿속이 하얗다면 기억을 더듬어도 단서를 찾기는 힘들 거예요. 아차 싶어도 속으로 ‘아, 우리 엄마, 우리 아빠.’ 한 번 부르고 말 거예요. 엄마 생각이 나도, 아빠 생각이 나도 그저 ‘에이그……’하고 말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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