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머리 짐승 May 19. 2020

역사

해마다 이맘때면 뉴스 지면을 가득 메우는 세 개 숫자는 제게 슬픔과 분노라기보다 실은, 모호한 공포의 느낌이에요. 열한 살 되던 해 늦은 겨울밤이었어요. 왜 그 시절엔 아홉 시 뉴스가 끝날 시간만 되면 TV를 더 보고 싶어 자기 싫은 자와 재워야 하는 자 사이 묘한 긴장감이 감돌잖아요. 한데 그날은 스포츠 뉴스까지 다 봤음에도 아빠, 엄마는 방으로 들어가란 말을 하지 않았어요.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면 다음 프로그램 타이틀은 해 지는 배경이었어요. “웬일이래, 이거 뭐야? “ 어리둥절 묻는 아들에게 아빠가 말했어요. “그냥 봐봐 “


회칠된 방 안에 태극기로 덮은 수십 개의 관이 놓여 있었어요. 그 위에 엎어져 관을 쓰다듬고 있는 짙은 파마 아주머니가 보였고요. 병원 입구에 들어선 카메라 앞으로 담배를 문 장발의 러닝셔츠 아저씨가 지나갔는데 이후 카메라에 비친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카메라 쪽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팬티 바람의 사람들이 앞사람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개 숙인 채 트럭 짐칸에 오르고 있었어요. 어깨에 총 멘 군인들은 시커먼 곤봉으로 올라가기 위해 지지할 곳을 더듬거리는 아저씨의 등을 후려쳤어요. 바닥을 구르는 아저씨 배를 철모 쓴 군인의 군홧발이 밟고 지나갔다가 되돌아온 같은 발이 이번에는 등을 밟고 넘었어요. 이후 곤봉을 몇 대 더 맞은 그 아저씨는 옆으로 툭 쓰러지더니 더 이상 더듬거리지도 구르지도 웅크리지조차 않았죠. 안 했는지 못했는지는 모르겠어요. 화면이 바뀌면서 공중에 멈춘 헬리콥터가 보였어요. 사다리가 내려와 맞고 있는 사람과 구르다 쓰러진 아저씨를 구해 주려나 싶었는데 옷이 찢어진 사람들은 오히려 헬리콥터와 멀어지는 방향으로 뛰었어요. 군복 입은 사람들은 헬리콥터 위치보다 뛰어 도망가는 사람들을 쫓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는 듯했어요. 검은 헬리콥터는 끝내 썩은 동아줄 한 가닥 내려 보내지 않은 채 그대로 멈춰 있었어요. 가끔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르는 총소리도 났어요. 그때마다 카메라는 우왕좌왕했지만 끝내 총탄의 근원은 잡아내지 못했어요. 탱크 소리, 트럭 소리, 총소리가 섞여 비명, 울음, 윽박지르는 소리마저 잡아먹었지만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이었어요. 장면 간 연결이 되지 않았어요.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적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고요. 방학 때마다 읽기 숙제로 나왔던 반공 서적들에서 국군은, 빨간 별 모자 쓴 늑대로부터 우리를 구한 뒤 인자하게 웃어주는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때리고 짓밟는 사람들 얼굴에 도저히 웃음이 입혀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국군의 모자에 박힌 계급장들이 빨간 별처럼 느껴졌어요. 1989년 2월 3일 MBC가 방영한 ‘어머니의 노래’에서 제가 기억하는 장면들이에요.


‘어머니의 노래’가 1980년 5월 광주의 이야기란 걸 알게 된 건 대학에 들어간 뒤였어요. 중간고사와 축제 사이 중앙도서관과 학생회관 벽을 타고 플래카드들이 세로로 걸렸어요. ‘5.18’, ‘6월 항쟁’, ‘이한열’이 쓰여있었어요. 연단에 선 선배들은 절규와 눈물로 연설을 이어갔고 눈물조차 마른 듯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떠나보낸 자식, 형제, 친구들의 이야기가 간간이 들려줬어요. 마주 선 도서관과 학생회관 사이는 슬픔과 분노의 기운이 압도했어요. 연단에서 제일 먼 곳에 가만히 서서 구경하고 있는데 선배 하나가 제 손을 잡았어요. 끌려가다시피 따라간 어두운 강의실에서 ‘어머니의 노래’를 중간쯤부터 다시 봤어요. 1989년 어느 겨울밤, 빨간 별 모자에 늑대 얼굴이었다면 퍽 잘 어울렸을 국군의 이미지가 슬픔을 다시 덮어버렸어요.


잘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어요. 왜 사람들은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말만 하는지. 왜 이미 글러먹은 자 그늘에 숨어 호의호식하거나 숨만 살짝 죽이고 있다 뿐이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끄나풀 빨간 별 모자들은 왜 가만히 놔두는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척했을 뿐 아무 잘못 없소 하는 수많은 총잡이, 곤봉잡이들은 대체 어디들 숨어있는 겐지. 코끼리 귀, 푹 퍼진 코 영감만 “본인이 잘못했소이다” 하면 정말 다 끝나는 일이 되는지. 그 끄나풀들이 살아남아 입김을 불고 그게 악취인 줄 알면서도 발가락 사이에서 긁어낸 때 냄새 맡듯 취한 사람들이 여전히 불어대는 일고의 가치 없는 5.18 궤변 또한 모두 골프 좋아하는 영감 탓으로만 돌릴 건지. 정말 그렇게만 하면 끝날까요? 역사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4.19의 함성이 채 잦아들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나타났고, 선글라스가 총 맞아 죽은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총 맞은 자의 끄나풀이었던 ‘본인’이 스스로 왕좌에 올랐으며, 6월민주항쟁 끝에 친구만큼 귀가 큰 ‘보통사람’이 그 자리를 물려받았고, 그 뒤에도, 십수 년이 지난 뒤에도……


누구는 그래요. ‘어떤 군중은 상점의 약탈과 살인, 강간을 서슴지 않으며, 어떤 군중은 개인이었다면 다다르기 어려웠을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다. 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숭고했다기보다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지닌 숭고함이 군중의 힘을 빌려 발현된 것이며, 전자의 개인들이 특별히 야만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야만이 군중의 힘을 빌려 극대화된 것’이라고. –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인용, 다만 한강이 쓴 구절인지 한강 또한 인용한 구절인지는 확실하지 않음 – 5.18광주민주화운동은 군중의 힘을 빌려 이타성과 용기를 획득한 한 사람 한 사람을 군중의 힘을 빌려 야만성을 극대화한 한 놈 한 놈이 무참히 짓밟은 역사예요. 군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여 숭고함이 가려질 수는 없으며, 군중의 한 놈이었다 하여 야만성이 감춰질 수 없어요. 


그 졸개 무리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는 자가 대통령이었던 시절부터 40년 전 광주에서,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어 떠났거나 차마 떠나지 못해 살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었어요. 황석영, 박세길, 공선옥, 한강, 유시민 이 쓴 기록과 이야기 들이 그날들에 대한 공포에 비로소 슬픔을 얹었어요. 누구는 스스로가 가장 예뻤을 때 예쁜 줄도 모르고 슬퍼했고(공선옥,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또 다른 누구는 응당 살아야 할 삶을 치욕으로 느끼는 망상에 시달려야 했어요(한강, 소년이 온다). 유시민은 ‘서울역 회군’1)의 미안함을 인류 혁명사와 생존 본능으로 보편화하여 설명(또는 변명)할 수밖에 없었고, 황석영(과 이재의, 전용호)은 장장 600쪽에 걸쳐 스무 살 갓 넘은 양복집 종업원의 이름까지 낱낱이 기록했어요. 황석영은 “이 빛나는 계절에 위대한 시민들은 세상을 바꾸어놓았다”고 썼지만 사실 1980년 광주의 5월이 바꾼 건 광주, 사람들의, 삶뿐이었어요. 그때 살아남았던 군복 입은 군중 속 한 놈 한 놈 들이 ‘그래도 되는구나’를 깨달은 탓에 세상이 바뀌기까지 7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그 사이 박종철과 이한열이 죽었어요. 제 슬픔은 여기 있어요.


아직 살아있어요. 살아있다 뿐인가요, 아직 입김을 불어내요. 그 입김이 악취를 풍겨요. 며칠 전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조사 개시를 발표했어요. 핵심 과제가 ‘최초 발포 명령자 찾기’래요. 1980년 광주에서는 총탄에 죽어간 이들도 있지만 맞아 죽은 이, 공포에 질려 도망하다 사고로 죽은 이, 치욕을 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살았어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이들이 또 그만큼 있어요. 그래서 진상조사위원회의 과제는 ‘코끼리 귀 자백받아내기’만이어서는 안 돼요. 그때 광주 시민의 반대편 군중이었던 한 놈 한 놈들 찾아내기도 함께여야 해요. 


그래야 끝이, 보일 거예요.


오늘 아이들에게 1980년 5월 광주에 대해 이야기해 줄 거예요. 잊지 않아야 해요. 아이들은 끝도 없이 질문할 거예요.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어 흥미를 잃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얘기할 거예요.



1)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 운집해있던 대학생 시위대가 계엄군 투입 소식을 접하고 자체 해산을 결정한 일, 이 사건은 며칠 뒤 신군부의 광주 무력 진압에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기였다고 평가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친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