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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Jun 19. 2020

05:00

외벽 전면(全面) 유리를 통과한 햇살이 보안 게이트 아크릴 개폐문을 수십 번 때리는 동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수천 번도 더 드나든 그 작은 문에 도저히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저 오늘 휴가 쓸게요. 죄송합니다”

회사 1층에서 전화로 휴가를 알리고 외벽 전면 유리 아래 회전문을 통과하여 햇살 속으로 나왔습니다. 정확히 기억해요. 6년 전 5월의 마지막 날이었어요.


소모되고 있다 느꼈습니다. 오랫동안 팔리지 않은 한여름 수박처럼 속부터 곯다 결국은 껍질까지 흐늘거릴 것 같았습니다.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라 지치는 게 직장생활이라고들 하지만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약간 다른 결이었어요. 목표가 있었지만 멀었고, 어떻게 닿는지도 알았지만 불편했으며, 다 참고 산다, 참을 수 있겠다, 참아야 한다 여겼지만 어느 날부터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티끌만 한 변화조차 거부하는 식물성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죠. 반복은 지겹지만 변화는 역겨운 그런 역설, 게으름, 무력함.

 

오랫동안 할까 말까 망설이기만 했던 일을 하고 있어요. 혼자고요, 목표 따윈 없어요. 그야말로 똑같은 하루의 반복입니다. 다섯 시에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바나나 한 개 또는 아몬드 몇 알을 먹어요. 포트에 물을 올리고 커피 원두를 갈아 종이 필터에 쏟아붓죠. 물이 끓는 동안 몇 개의 단어를 떠올려요. 끓은 물을 종이 필터에 천천히 돌려가며 흘려요. 반으로 자른 대나무 관으로 물길만을 돌려놓은 동네 뒷산 약숫물 소리가 들려요. 오 분쯤 기다리는 동안 여전히 그 날의 단어들을 떠올립니다. 사실 떠오르는 날도 있고 떠올리는 날도 있어요. 물론 떠오르지도 떠올릴 수도 없는 날들이 많지만요. 종이와 펜을 옆에 두고 워드 파일을 엽니다. 식구들이 모두 일어날 때까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죠.


한 가지 일을 매일 하다 보면 놀라운 변화 따위는 생기지 않아요. 별일이라 할 만한 것조차 일어나지 않죠. 당장 책으로 쓸 만한, 돈이 될 만한 글은 좀체 나오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에 열의를 다한다 해도 고맙고 신나는 시간만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에요. 나는 왜 어느 작가처럼 천재가 아닐까 싶고, 팔이 마비되고 엉덩이 짓무를 만큼의 악바리도 못될까 싶으며, 엉덩이 짓무르는 천재도 될까 말까 한 이 판에서 나는 대체 뭘 믿고 버티나 싶기도 해요. 이쯤 되니 차라리 6년 전 5월 31일의 생활로 돌아가고픈 날도 더러 있어요. 그래도 그때는 월급이 있었으니까요. 식물성 인간이었을지언정 제 존재 가치가 매겨졌으니까요.


오늘 아침 큰 아이가 불렀어요. 

    “아빠, 빨리 내려와 봐”

    “아, 또, 왜?”

오늘 아침만 벌써 세 번째였어요.

    “나 키 백삼십일 센티미터야. 그게 왜 중요하냐면 나는 이제 빙빙 돌아가다 훅 떨어지고 빙빙 돌아가다 훅 떨어지는, 아, 그 이름이 뭐더라? 어쨌든 그 놀이기구 아빠 없이 탈 수 있어. 백삼십 센티미터가 넘어야 되거든”


그래요. 매일 한 가지 일에 매달리면 자꾸 자라는 기분이 들어요. 뭐랄까, 하룻밤 사이 자란 잔디만큼 자꾸, 조금씩. 머릿속에선 맴도는데 문장으로 뱉을 수 없었던 느낌도 써지고요,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 리듬도 생겨나요. 평범했던 비유에 각이 살고요, 무심코 읽고 “아니, 글쎄 이런 일이 있었대” 기사들이 다르게 읽혀요. 대단하지 않아요. 알아요, 저도.

 

매일 새벽 벌어질 1센티의 변화를 자꾸 기대하게 돼요. 비록 제게만 보이는 복근 같은 것일 뿐이지만, 그래 봐야 한참이 지난 뒤에, 한참을 다듬어야 책으로 나올 이야기들이지만 작은 변화를 감지해 그걸 문장으로 써내는 예민함이 여전히 새벽 다섯 시 눈을 뜨게 만들어요.


흰머리 짐승도 고쳐쓸 수 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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