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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페트라 May 23. 2023

천사들이 내려앉는 바위산, 앤젤스 랜딩

미국 그곳, 그 사람들 - ④

  미서부의 3대 협곡 중 그랜드 캐니언이 가장 대표적이지만, 자이언 캐니언은 그에 못지않게 유명한 트레킹 코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중 앤젤스 랜딩은 천사가 앉는 곳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악명이 높은데, 험준하여 트레킹 부주의로 2000년 이후 14명 사망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자이언 캐니언 국립공원에 도착했을 때 그런 이야기들은 와닿지도 않았다. 나는 2주간의 여행으로 피로감에 지쳐있었다. 체력이 원체 좋았던 나를 힘들게 만든 것은 육체적 피로가 아닌 정신적 피로였다. 


  미국 여행 프로그램을 한국에 있는 대행사를 통해 신청하고 홀로 미국으로 온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은 워싱턴의 한 호텔에 모였고 밴을 타고 횡단 여행을 시작할 멤버들이 팀별로 나누어졌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외국인 친구들과 얼른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영국, 스위스, 호주에서 온, 영어가 모국어나 다름없는 나라 출신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내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나는 한국에서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받는 대학생이었다. 토익 성적은 900점이 넘는 고득점의 기록이 있었고 영어 말하기로 학창 시절 도대회에서 수상을 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하루 종일 함께 먹고, 자고 협동심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에서 언어의 장벽은 그리 쉽게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들이 쉽게 접하지 않았던 인종적인 차이에서도 그들은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다행히 한국 친구 한 명도 같은 멤버가 되어 가끔 한국어로 대화를 했지만 둘이서만 친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구성원들은 함께 세 끼 식사를 만들어 먹고 설거지를 하고 텐트를 설치해야 하는 사이였다. 협동심은 필수였고 생존을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에서는 나름 자신감도 있고 친화력도 적당히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대화의 웃음 포인트를 빠르게 잡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짓는, 소외되어 가는 소심한 멤버로 첫 이미지를 각인시키게 되었다. 이때 나는 용기를 내어 솔직해졌다. 가장 리더십이 있다고 생각한 친구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나는 너희 대화의 60프로 정도만 이해하고 있어. 미국 영어는 더 잘 이해하지만 영국, 호주 발음은 내게 아직 낯설거든. 혹시 가끔 내가 대화에 잘 끼지 못해도 좀 배려해주고 도와줄 수 있을까? 그 여자 친구는 중학교 체육선생님에 걸맞게 키가 컸는데, 흔쾌히 수긍하고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이후 여행 프로그램 중 래프팅, 등반 코스를 통해 웃고 부대끼며 그런 거리감은 점점 줄어들었고 친구들과 나는 서로를 이해해나갔다.


  이러한 노력들은 좋았으나 신경을 쓰는 과정에서 예민한 나의 정신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자이언 캐니언 등반을 하고 싶지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하기는 싫었다. 컨디션이 안 좋아 텐트에서 쉬고 싶다며 온갖 찡그리는 표정을 지어댔다. 하지만 내 시선은 캠핑장의 수영장에 꽂혔고, 힘든 등반 대신 그곳에서 빈둥거리겠다는 계획만 잔뜩 세우고 있었다. 거짓말인 것이 들통난 것이었을까, 등반 경험을 놓치는 게 안타까워 보였던 것일까. 여행 가이드와 친구들은 그래도 아예 포기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가보는 것은 어떠냐고 되물었다. 양심이 찔렸던 나는 오케이 한마디를 해버렸고 수영장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결국 등반을 하게 되었다. 


자이언 국립공원의 계곡


  그날 겪었던 신기한 경험은 잊을 수 없다. 체념하고 걷는 발걸음은 험준한 등산로를 따라 땀을 흘리면서 오히려 더욱 가벼워졌다. 정신에 휴식이 필요했던 내게 묵묵히 등반하는 과정은 쉼과 같게 느껴졌다. 미국 여행 전에 미리 다져놓은 체력은 힘을 발휘하여 다른 친구들보다 가볍게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가장 먼저 앤젤스 랜딩에 오르게 되었고, 뒤따라 도착한 친구들은 내게 아팠던 게 맞냐며 웃었다. 험준한 앤젤스 랜딩에 올라 주변 경치를 보면서 과연 수영장에서 놀기 위해 이런 경험을 놓쳤다면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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