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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Jan 26. 2024

18. 먹는 일에 진심

영양 상담을 끝내고 약국을 들러 종종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장을 볼 때 채소의 가격은 확인했어도 무게를 유심히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채소 450g 이 대체 얼만큼인지 감이 안 잡혔다. 검색을 해 보니 집 앞 마트에서 파는, 상추며 깻잎 등 다섯 가지 잎채소가 대여섯 장씩 들어 있는 모듬 쌈 한 봉이 200g이었다. 쌈 채소처럼 얄팍하고 야리야리한 채소로는 권장량을 채울 수가 없겠는걸? 당근, 콜라비, 브로콜리처럼 묵직한 채소로 ‘중량 치기’를 해야겠네. 저녁으로 양파 카레를 끓이면서 당근 스틱과 데친 브로콜리를 주방 저울에 달아 150g을 먹어 치웠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영양사에게 받은 브로슈어에는 하루 5가지 이상의 다양한 채소를 섭취하라고 적혀 있었다. 채소를 좋아하고 즐겨 먹는 편이지만 앞으로는 정해진 할당량을 채워서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지금 같은 한겨울에는 채소 값이 여름철보다 두 배로  비싸다.  만약에 ‘유기농’ 식품을 선택하기라도 한다면… 계산을 해 볼까? O 생활 협동조합의 온라인 매장에 올라와 있는 채소들의 가격을 100g 단위로 환산해 보았다. 상추 2050원, 콩나물 1300원, 시금치 1120원, 토마토 670원, 당근 580원, 무 260원. 제일 비싼 상추를 제외하고 콩나물, 시금치, 토마토, 당근, 무를 100g씩 산다고 치면 3930원이었다. 오직 나만을 위해, 나의 건강을 위해 매일 채소를 4000원어치씩 산다… 뭐라도 아끼고 싶은 주부의 마음을 내려놓아야 장바구니를 채소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암 환자의 채소 구입비에도 산정특례(진료비 본인부담이 높은 암 등 중증질환자와 희귀 질환자, 중증난치질환자에 대하여 본인부담률을 경감해 주는 제도. 암 환자는 5%만 부담한다.)를 적용한다면 최고의 복지국가로 거듭날 텐데.


돈도 돈이지만 채소를 섭취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적잖이 든다. 장을 보고 씻고 다듬는 건 기본이다. 나물로 먹으려면 여기에 데치거나 볶고 양념을 하는 과정이 추가된다. 바로 그 지점부터 생각을 하기가 싫어졌다. 내가 먹을 채소를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 같은데 가족들의  식사는 어떻게 하지? 주방에서 에너지를 다 써 버리면 글은 언제 쓰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먹는 일에 진심인 편이다. 아무 거나 먹어서 허기를 달래면 그뿐인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밥에 김치와 달걀 프라이, 구운 김으로 한 끼를 먹더라도 그릇에 예쁘게 담아 먹는다. 반찬이 김치와 달걀 프라이와 구운 김뿐이어도 갓 지은 밥과 곁들이면 충분히 맛있다. 가능하면 새로 밥을 지어먹는데 그걸 번거롭다고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내가 이런 사람이 된 건 전적으로 엄마 때문이다. 엄마는 결혼하기 전까지 돈 걱정을 모르고 살았다. 하지만 결혼으로 판이 뒤집혔다. 평생 돈을 쓰고 살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나가서 돈을 벌어 와야 할 팔자가 되었다. 삼시 세끼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던 가정주부의 눈에 들어온 건 한식 조리사 자격증이었다. 당시에는 꽤 희소성이 있는 자격증이었다고 한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1983년, 조리사 자격증이 발급된 첫 해에 자격증을 취득했고 그 자격증을 활용해 음식을 만드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엄마가 집에서만 요리를 하던 시절에 나는 엄마가 만든 음식의 몇 안 되는 수혜자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외식이 보편화된 시절이 아니었고, 우리 집은 외식을 할 만큼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지만 외식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 수가 없었다. 진짜 맛있는 음식은 집에 있었으니까. 엄마의 음식은 재료의 본질을 살리면서 자극적이지 않고, 간은 적당해서  입에서는 맛있고 위에서는 편안했다. 맛과 정성에 음식에 대한 철학까지 담긴 세끼를 꼬박꼬박 먹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일찌감치 먹는 즐거움에 눈을 떴다. 돈을 벌면서  식도락을 즐겼고 내 손으로 요리를 하는 재미도 맛보았다. 한 가족의 식탁을 책임지게 되면서 내 아이들이 먹는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 주부 생활 20년 차가 되기까지 밥 하기가 지겨웠던 적은 분명히 있었다. 아이들이 방학을 맞았을 때, 코로나로 집에 갇혔을 때, 배달 음식과 밀키트와 반찬 가게가 없었다면 괴성을 지르며 주방을 뛰쳐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열에 아홉은, 오후 다섯 시부터 오늘 저녁 식사의 메인 음식을 무엇으로 할지 생각하고 주방으로 들어간다. 하루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칼질로 풀고, 완성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가족들을 보면서 보람을 챙겨 왔다. 촉촉하면서 바삭한 돈가스를 만들기 위해  돼지 등심을 사서 밑간을 하고 식빵을 갈아서 튀김옷을 만들었다. 주방에서 막 튀겨서 한 김 식혀 썰은 돈가스는 배달시킨 돈가스와 비교가 안 되니까.    


병원에서 받은 <항호르몬 요법시의 식사요법> 브로우셔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줄여 봅시다’ 항목에는 단순당, 고지방 육류(예 : 삼겹살, 갈비, 닭 껍질), 가공육, 버터, 튀김, 과일즙과 주스, 믹스커피와 가당 음료가, ‘권장합니다’ 항목에는 섬유소가 풍부한 잡곡밥과 통밀빵, 살코기, 등 푸른 생선, 식물성 기름(참기름, 들기름, 올리브유), 구이, 찜, 조림, 생과일, 블랙커피, 녹차, 허브티가 예로 제시되어 있었다. 아침에 생크림 식빵을 토스트로 구워서 버터를 발라 먹으면 안 되겠군. 밤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출출하다고 라면을 끓여 먹어도 안 되겠군. 지방이 적당히 섞인 돼지고기에 각종 야채를 투하해 볶으면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는데 그것도 안 되려나? 우리 집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닭 날개를 전분과 달걀흰자에 묻혀 튀겨서 간장 소스에 졸이는 나의 십팔번 요리 ‘닭 날개 간장 조림’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보다도  돈가스와 이별한다는 사실에 울적했다. 20년 동안 쌓아 올린 나의 요리 세계가 빙하가 녹듯이 붕괴하는 것 같았다.  


브로우셔에는 밀가루, 흰밥, 설탕이 직접적으로 유방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근거는 없지만 탄수화물과 첨가당 섭취가 과다해지면 체중/체지방이 증가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영혼의 치료제인 디저트, 떡볶이와도 헤어져야 한다는 말인가? 어디까지 줄여야 재발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 말라면 더 격하게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라 반발심이 솟아날 만도 한데, 묘하게 오기가 발동했다. 어디 하라는 대로 해 보자. 먹는 즐거움을 제물로 바치는 대가로 평화를 얻는다면 못할 것도 없지.


3일 동안 ‘줄여 봅시다’에 해당되는 음식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권장합니다’만 입으로 들여보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무슨 뜻인지 몰랐던, ‘입맛이 없다’는 말이 혀에 착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자극적이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나 보다. 목구멍으로 음식을 넘기기까지 미각세포가 아무런 기능을 못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음식을 평생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아직 방사선 치료는 시작도 안 했는데 일단 잘 먹어야 하지 않을까? 딸과 삼계탕을 먹으러 갔다. 닭 껍질의 지방이 국물에 고스란히 우러났겠지만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뚝배기 밑바닥에서 이 식사요법을 이어 가려면 ‘치팅 데이’가 필요할 거라는 깨달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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