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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Feb 09. 2024

20. 다시 마왕을 만나다

첫 방사선 치료를 받은 날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왜 잠들지 못했지? 커피는 딱 한 잔 마셨고,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긴장감에 시달리지도 않았는데… 출강할 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수업 계획서는 미리 제출했고 학생들이 구매할 교재도 확정했다. 방사선 치료는 개학하고 3주면 끝나니까 컨디션을 잘 관리하면 평소처럼 출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방사선 치료 시간이 오후 6시 10분으로 변경되었다. 전날과 달리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병원에 도착해서 기분도 괜찮았다. 첫날의 어색하고 낯선 느낌은 이미 사라졌다. 기계적으로 도착 접수를 하고 탈의실에 들어가 가운으로 갈아입고 5분쯤 기다렸다가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마치고 가운을 여미는데  방사선사가 오늘부터 샤워를 해도 된다고 했다. 앗싸! 내일은 좀 더 깨끗한 몸으로 찾아뵙겠다고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샤워를 하면서 수술 부위를 만져보니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유방이 더 딱딱해질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온다고 했다. 시간이 해결할 부분에 조바심을 내는 것만큼  미련한 일이 없다. 갑자기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는 어려우니 매일 조금씩 덜 미련하기라도 하자. 되찾은 샤워의 기쁨을 만끽하고 잠이 들었다.  


방사선 치료 3일째 아침에 머리가 너무 아팠다. 이틀 연속으로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냥 침대에 누워 있고 싶었지만 정해진 시간에 항호르몬제를 먹어야 해서 억지로 일어났다. 채소찜과 통밀빵과 두유를 꾸역꾸역 먹고 다시 누웠다. 내일은 강의 개요와 수행평가 기준표를 만들어서 올려야 하는데, 머리가 아프니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몸이 긴장해서 잘 못 자는 건가? 혹시나 싶어서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오후 6시 10분에 방사선 치료를 다녀오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11시쯤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치료 4일째 되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누운 지 30분쯤 지나서 잠들었는데 수시로 깼고, 새벽녘부터는 아예 잠들지 못했다. 컨디션은 별로였지만 일을 하려고 노트북을 켰다. 주말에는 치료를 쉬었고, 남편과 아이들이 여행을 가서 집이 조용했다. 불면 흐름을 돌려 보려고 반신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예닐곱 번 깨긴 했어도 아예 못 자지는 않았다. 한 고비를 넘는 건가 싶었는데, 그다음 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서 한숨도 자지 못한 채로 아침을 맞았다. 불면 7일째였다. 나는 완전히 공포에 질렸다. 다시 마왕이 돌아왔던 것이다.


나는 2016년에 처음 불면증을 겪었다. 아예 잠들지 못하는 입면 장애, 중간에 여러 번 깨는 중도 각성, 새벽녘에 깨서 다시 잠들지 못하는 조조 각성 등을 고루 경험했다. 잠들지 못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죄수를 고문할 때 쓰였던 방법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불면증은 삶의 의지를 천천히 말려 버린다. 두어 달 동안 지속된 불면에서 겨우 벗어날 즈음에 우울증과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그 시절에 나는 내 삶에 대한 통제권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것 같았고, 그 누군가를 ‘마왕’이라고 불렀다. 다시 마왕이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개학이 3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학기 중간에 출근을 하지 못하게 되면 최악이니까, 결정을 내려야 했다. 교장 선생님께 메시지를 보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불면증이 시작되어서 이번 학기 수업을 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썼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6년 동안 부지런히 다닌 직장을 하루아침에 못 나가게 되다니…


여섯 번째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갔다. 치료와 함께 담당 교수의 진료를 받기로 정해진 날이라, 정신건강의학과 협진을 잡아 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환자가 많아서 진료가 3일 뒤로 밀렸다고 했다. 나는 불면의 바다에서 일주일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당장 오늘 밤을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과 말다툼까지 했다. 환자의 가족으로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고통은 오롯이 환자의 몫이다. “암도 내가 걸렸고, 불면증도 내가 걸렸다고!” 이 고통의 지분에 너의 몫은 없다고 울부짖었다. 한번 감정이 요동을 치기 시작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력으로는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서랍을 뒤지니 졸피뎀이 다섯 알 나왔다. 여행지에서 잠자리가 바뀌면 종종 잠을 못 자기도 해서 동네 가정의학과 의원에서 수면제 처방을 받았었는데, 다행히 약이 남아 있었다. 졸피뎀을 한 알 먹고 잠을 청했다.


약의 힘으로 겨우 잠들었지만 아침이 반갑지 않았다. 간밤에 너무 울어서 쌍꺼풀이 없어졌고 기분은 울적했다. 잠도 못 자는데 정서적으로 가라앉기까지 하면 대책이 없다. 억지로 집에서 나와 걸었다. 골목길 안쪽에 있는 빌라 화단에 매화가 피었는지 살피러 갔다. 높은 가지에 몇 송이만 피어서 향기를 맡을 수 없었지만 꽃이 피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았다. 작년 이맘때 제주 한림공원에서 흐드러지게 핀 매화 사이를 거닐었는데, 그날의 기억이 꿈처럼 아득했다. 그 기억이 겹치니 내가 살아 내야 할 오늘이 더 냉엄하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고 계속 걸었다. 집에서 2.3km 떨어진 테라로사 국립현대미술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커피가 간절히 마시고 싶었지만 불면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카페인을 추가할 수는 없었다. 커피의 전당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다니 서글펐다. 흐릿한 계피맛이 나지만 맹물에 가까운 시나몬 티를 마시면서 공휴일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을 흘끔거렸다. 수첩을 꺼내 한심한 말들을 끄적거리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남편이 사과를 했다. 사과를 했으니 받으면 되는데 오히려 더 울컥했다. 남편은 내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마음 아파했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간병인 역할을 했다. 그가 나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쓴 건 사실이고, 고맙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엇박자가 났다. 나는 내 병에 대해서, 유방암에 관해서 그가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굿바이 유방암>을 읽어달라고 부탁했고, 항호르몬 식사요법에 따라 나를 먹이고 관리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우니 주말에 아이들의 끼니를 챙겨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남편은 음식을 할 줄 아는 사람이므로 그리  어려운 일을 맡긴 게 아닌데, 자꾸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요청한 것은 해 주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기에 내게 필요한 것,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해 주려고 했다. 나로서는  답답할 따름이었다. 수면 패턴이 꼬였는데 감정이 증폭되기까지 했으니, 마음의 평온은 손에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졌다. 잠을 되찾기 위해서 남편에게 다시 한번 내가 원하는 걸 말했다.


8번째 방사선 치료를 받는 날 드디어 방사선종양학과 담당 교수를 만났다. 의사에게 지난 열흘 동안 잠을 거의 자지 못했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졸피뎀을 두 번 먹었다고 말했다. 의사는 방사선 부작용은 아닐 거고, 내가 한 달 전부터 복용하기 시작한 항호르몬제, 타목시펜 때문일 거라고 했다. 타목시펜은 잠을 안 오게도 하고 반대로 종일 과하게 오기도 하는데 몸이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나. “교수님, 저는 지금 너무 힘들거든요.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었어요.” “그래요? 직장은 안 그만두시는 게 좋은데… 집에서 늘어져 있는 것보다 활동을 하시는 게 수면에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 타목시펜을 5년간 먹어야 하니 적응을 하셔야 합니다. 졸피뎀이 얼마나 있으시죠? 너무 힘들면 약을 드시고요.” 의사의 말을 듣는 순간 그는 나를, 나의 고통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가 알 수 없으니 내가 알릴 수밖에. 의사가 수면 클리닉 진료를 요청한다고 오더를 넣을 때까지 나는 물러서지 않고 괴로움을 토로했다. “예약을 잡고 문자를 드릴 테니 진료를 받으세요. 타목시펜을 며칠 끊어보면 불면의 원인이 더 확실해집니다. 며칠 안 먹는다고 대세에 크게 지장이 있지는 않으니까요.”


집에 돌아왔지만 예약 문자는 오지 않았다. 왜 문자가 안 오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예약 문자는 진료 2주 전에 온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일단 불면증의 원인이 타목시펜인지 알기 위해서 복용을 중단했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대학 병원 방사선종양학과 간호사실로 전화를 했다. 교수님이 수면 클리닉 진료를 잡아준다고 했는데 예약 문자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간호사는 정신건강의학과  OOO 교수님으로 진료 예약이 되어 있고, 날짜는 4월 4일이라고 했다. 2주째 불면이 지속되고 있는데 4주 뒤에나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 기가 막혔다. 하루라도 빨리 진료를 받고 싶다고 읍소를 했더니 다시 예약을 잡아서 오후에 전화를 준다고 했다. 다시 잡힌 예약은 열흘이 앞당겨진 3월 24일이었다. 간호사는 교수님 진료를 앞당길 수는 없어서 펠로우 선생님 진료를 예약했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하지? 내가 결정을 못 내리니 간호사는 일단 두 예약을 다 잡아놓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타목시펜을 끊은 지 닷새만에 잠다운 잠을 잤다. 꿈도 없이, 중간에 깨는 일도 없이 숙면을 취했다. 마왕의 정체가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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