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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Mar 16. 2024

25. 버티는 계절

과학고등학교에서 기대와 달리 마뜩잖게 특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출판사 대표님의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은 인천에 있는 도서관에서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했다. 좋은 소식이고 좋아야 하는데, 방금 특강을 말아먹은 듯한 기분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좋지가 않았다. 또 망하면 어쩌지? 불안감이 퐁퐁 솟아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두유를 한 잔 마시고 성곽길을 걸으러 나가기 시작한 지 이틀째 되는 날, 정식으로 강의를 의뢰한다는 메일을 받았다. 다행히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강의였고, 그 강의를 들은 참가자들이 열흘 동안 <집 밖은 정원>을 한 챕터씩 읽고 밴드에 식물 관찰기와 소감을 올리면 내가 댓글을 달아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이 너무 좋아서 수락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메일을 자세히 보니 강의 시간이 2시간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청중과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북토크가 아니고, 2시간 동안 나 혼자 말을 해야 했다. 강의할 내용을 대강 계획하고 시험 삼아 녹음을 해 보았다. 10분쯤 녹음을 하고 재생 버튼을 눌렀는데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이 버벅거리는 아주머니는 누구신가요? 글을 못 쓰는 줄만 알았는데 이제는 말도 못 하네… 과거의 나는 달변은 아니어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세 마디만 해도 버퍼링이 일어났다. 그러니 이 강의를 제대로 하려면 2시간 분량의 강의 원고를 작성해서 그걸 ‘자연스럽게’ 읽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는 생각을 밀어내려면 눈곱만큼이라도 성취감이 필요했다. 수면제를 먹어도 자꾸 깨고, 깊은 잠을 자지 못해서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지만 눈을 뜨면 자리를 박차고 나와 운동화를 신었다. 15분 정도 걸으면 막내가 다니던 어린이집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거기까지 가는 것도 벅차서 벤치에 15분 넘게 앉아 있었다. 운동보다 쉬는 시간이 더 긴, 운동 같지 않은 운동을 하고 어기적 어기적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서서 샤워를 할 수가 없었다. 욕실에 철퍼덕 앉아서 몸을 씻고 잠깐 쉬려고 누웠다가 정신을 차리면 2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래도 되찾은 정신으로 조금씩 강의 원고를 썼다. 2주 동안 성곽길을 오르고 지쳐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강의 원고를 완성했다. 그 원고에 맞추어 슬라이드를 만드는 데 집중한 날은 우울하지도, 무기력하지도, 울컥하지도 않았다. 


6월의 마지막 날, 스포츠센터에 가서 운동화를 찾아왔다. 이미 장마철이고, 비가 오면 성곽길을 걷지 못하고, 비가 안 와도 덥고 습해서 여기에서 운동해야 한다고 아무리 나를 설득해도 설득이 안 되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즐거운 기억이라고는 도대체 떠오르지 않는 2023년의 절반이 지나갔다. 7월 1일부터는 새 마음으로 지낼 수 있겠지, 의욕에 차서 아침 일찍 성곽길에 올랐다. 근력 운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계속 있어서 혹시나 하고 스쿼트를 20개 했는데 역시나 다리가 너무 아파서 걸을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날은 점점 덥고, 습해졌다. 원래 여름을 힘들어하는 편인데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헬스장을 놔두고 성곽길을 걷는 나 자신이 미련해 보였고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마친 지 4개월에  접어들었는데 왜 체력이 회복되지 않는지 혼란스러웠다. 그즈음에 배우 겸 모델 배정남의 반려견 벨이 재활 훈련을 하는 영상을 보았다. 벨은 급성 디스크로 수술을 했고, 수술 직후에는 일어서지도, 목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바퀴가 달린 보조기에 몸을 묶고 걷는 훈련을 하는 벨 옆에서 배정남과 치료사는 수도 없이 “옳지, 옳지, 잘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지금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말을 찾았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는 놀랐지만  0기라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수술과 방사선 치료만 잘 마치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항호르몬제 부작용으로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길어지면서 우울감과 무력감이 몰려왔고 뭐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내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두려웠다. 방향감각을 상실했는데 그걸 알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난 누구 여긴 어디’의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이 미궁을 탈출하려면 벨처럼 매일 조금씩 앞으로 나가야 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평소에 반환점으로 삼았던 어린이집 뒤편 벤치에 도착했는데 조금 더 올라가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조금 더’는 급경사로 이어져서 걸음을 옮기자마자 후회막심이었다. 헉헉거리며 가파른 경사로를 올랐더니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다. 다시 어린이집 뒤편 벤치로 돌아와서 10분쯤 쉬고 집에 오는데 평소에 비해 다리가 아팠다. 그래도 샤워를 하고 눕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무적이었다. 옳지, 옳지, 잘한다. 그다음 날은 출강했던 대안학교 교장님께 연락을 했다. 2학기에 수업하러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수업 일정을 조율했다. 고등학교 1학년 고전 강독 수업과 글쓰기 수업을 하기로 했다. 수업 시간에 버퍼링이 일어날까 봐 불안하다면 두렵다면 몇 배로 더 준비해서 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날 오후에 도서관에서 의뢰받은 온라인 강의를 했다. 준비한 강의 원고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읽었다. 120분짜리 강의가 끝났을 때 반년만에 제대로 된 성취감을 맛보았다. 옳지, 옳지, 잘한다! 


본격적으로 성곽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었다. 내친김에 어제의 ‘조금 더’ 지점까지 올라갔다. 경사로의 끝에서 길은 세 갈래로 갈라졌다. 왼쪽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길, 가운데는 돌계단, 오른쪽은 성벽 밖으로 난 계단길이었다. 오른쪽 길을 선택했는데 그 길로 접어든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후회가 밀려왔다. 7월의 아침 햇살은 너무 따가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올랐다. 지옥은 분명히 끝없는 계단이 이어진 곳이라는 확신이 들 때쯤 성곽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왔다. 와룡정이라는 정자 맞은편 의자에 앉자마자 땀방울이 굵은 빗방울처럼 투둑투 떨어졌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냐… 정신이 혼미했지만 뿌듯했다. 이날부터 집에서 1.5km 떨어진 와룡공원 입구를 새로운 반환점으로 삼기로 하고 후들후들 떨리는 걸음을 내디뎠다. 아무 생각 없이 경사로를 5000보씩 걷는 것. 당분간 이것에 집중하면서 2학기 수업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2주 전에 했던 건강검진의 결과지를 받았다.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한 지 1년이 안 되어서 내시경 검사는 할 수 없다기에 기본적인 검사만 했다. 검사 결과는 그냥저냥 했다. 그런데 콜레스테롤 수치에 변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적정 수치의 총콜레스테롤은 200mg/dL 이하, LDL 콜레스테롤은 100mg/dL 이하, HDL 콜레스테롤은 40mg/dL 이상, 중성지방은 150mg/dL 이하로 알려져 있다. 몇 년 전부터 총콜레스테롤은 가볍게 200ml/dL을 돌파했는데, 이번 검사에서는 170mg/dL으로 내려갔다. 나머지 수치들도 모두 정상 범위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5개월 동안 식탁의 즐거움을 반납한 항호르몬 식이요법의 결과인가? 나는 건강하게 오래 생존하는 암 환자가 되는 길에 들어선 셈이었다. 


2023년 여름은 역대급으로 길고, 덥고, 습했다. 그 습하고 더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 틈만 나면 우울감과  무기력감이 찾아왔고 울컥 버튼이 눌리기라도 하면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곽길에 올랐고, 병원에서 안내받은 식단을 유지했고, 수업 준비를 했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삼시 세끼를 차렸다. 옳지, 옳지. 여름을 버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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