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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쥐마담 Apr 12. 2024

29. 최고의 선물

암 환자가 된 뒤로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선물을 받았다. 종류를 막론하고 선물에는 주는 이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나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 선물을 보낼 리가 만무하니까. 암이라는 신세계에서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라는 응원과 격려의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말이 말에 그치지 않도록 내 손에 물질을 안겨 주면 새록새록 감사하다. 하지만 번지수가 맞지 않는 선물이 날아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무척 난감했다.  


대략 난감인 선물 1번은 한국인의 대표 건강 보조제, 홍삼이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동료 M에게 수술을 이틀 앞둔 날 홍삼 선물을 받았다. M은 ‘면역력 증진에 도움이 되고자’ 선물을 보낸다고 했다. 나도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화답했다. 그런데 수술을 마친 뒤 나의 암종은 호르몬 양성 유방암으로 밝혀졌고, 유방암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면서 홍삼에 여성호르몬 유사 물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암세포의 수용체에 여성호르몬이 결합하지 못하도록 항호르몬제를 먹고 있는데, 그 항호르몬제로 인한 부작용으로 불면의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홍삼을 굳이 먹을 필요는 없다고 결론을 냈다. 그런데 주방 상부장에 넣어둔 홍삼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좀 과한가 싶어서 쓸데없는 생각을 잘 안 하는 여동생에게 물어보았다. “형부 먹으라고 하면 되잖아.” 여동생의 말처럼 다른 식구들에게 먹으라고 하면 되는데도 여전히 마음은 개운치 않았다. 그 홍삼에 깃든 M의 좋은 마음을 내가 온전히 누릴 수 없어서 아쉬웠고, 동시에 M이 유방암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같아서 섭섭했다.  


유방암 환자에게 선물을 보내는 사람이 유방암에 대해서 알아야 할까? 환자나 보호자만큼 알 필요는 없지만 선물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 보면 좋을 것 같다. 보내는 이의 마음과 물건 모두를 기쁘게 받고 누릴 수 있도록 이 낯선 세계를 조금 살펴보면 어떨까. 포털사이트나 동영상 공유 플랫폼에 ‘유방암 홍삼’이라고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다. 


우울감이 본격적으로 차오르기 시작한 5월에 지인이 카카오톡으로 건강식품을, 제자가 녹차 롤케이크를 보내 주었다. 항호르몬 식사 요법을 열심히 수행하고 싶었던 나로서는 모두 마음 편히 먹을 수 없는 선물들이었다. 좀 고민하다가 선물을 수락하지 않았다. 발신인들에게 선물을 보내주어서 정말 고맙지만 나는 이 음식들을 마음 편히 먹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설명하고 거절하니 훨씬 마음이 편했다. 최근에 지인에게 티라미수 케이크를 선물로 받았다. 예전처럼 보내주신 분께 항호르몬 식사 요법으로 디저트류를 먹지 않으니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는데 뭔가 아쉬웠다. 마음만 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꼭 뭔가를 보내고 싶으시면 사과를 보내달라고 했다. 집으로 배송된 사과를 와작와작 씹으며 두 배로 감사했다.


암 환자가 되어 제일 많이 받은 선물은 스타벅스, 본죽, 배달의민족 모바일 상품권이었다. 이 중에서 배달의민족 상품권이 가장 쓰기 어려웠다. 도저히 밥을 해 먹을 기운이 없어서 배달의민족 앱에 들어가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수많은 음식 중에 장바구니에 담을 것이 없다니. 버거와 피자와 치킨과 돈가스와 중식 사이에서 손가락은 길을 잃었다. 샐러드와 포케가 없었으면 한 푼도 못 쓸 뻔했다. 


역시 최고의 선물, 최선의 선물은 현금인가? 딱 한 분에게 현금을 받았다. 역시 지혜의 왕이시구나, 상대방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잘 모를 때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지. 금액이 얼마인지 모르고 수락을 눌렀는데 생각보다 너무 큰 금액이었다. 부담이 되었다.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나, 그분이 영전하면 화분이라도 보내드려야 하나… 그런데 이 부담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혔다. 그 부담감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면 좋아하고 존경하는 Y 언니가 암 수술을 했을 때 현금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언니는 너무 부담스러워서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다. 아차 싶었다. 복잡하고 미묘한 선물의 세계에서 나는 중심을 잘 잡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Y 언니에게 언니와 내가 모두 회복되어서 다가오는 겨울에 꼭 호캉스를 가자고, 이 돈은 그때 쓰자고 했다.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은 선물도 있다. 발신자의 이름이 없는 개똥쑥을 받았을 때 여러 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다. 개똥쑥이란 무엇에 쓰는 물건, 아니 식물인가, 나에게 왜 개똥쑥이 왔는가, 누가 보낸 지도 모르는 개똥쑥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똥쑥 암’에 대해 마이크로소프트의  AI 기반 검색 서비스 Bing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개똥쑥은 항암 효과가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개똥쑥에는 암세포를 골라 죽이는 아르테미신이 함유되어 있으며, 이는 암세포에 대한 선택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똥쑥을 정기적으로 섭취하면 암 예방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건강식품으로만 암을 치료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건강식품은 약이 아니기 때문에 암 치료를 위해서는 전문의와 상담하는 것이 좋습니다.” 개똥쑥을 재배한 농장에 전화를 걸어 주문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반송했다. 개똥쑥을 보낸 이의 마음은 받지 않아도 될 거 같았다. 


식사요법과 불면증과 우울감에 눌려서 정신을 못 차릴 때였다.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명동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지하철을 타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지막으로 이 시간에 밖에 나간 게 언제였더라? 한참을 헤아리고 나서야 석 달 전에 방사선 치료를 마친 날 이후로 저녁에는 외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전히 집에 유폐되어 있었구나. 사람들을 만나기 싫을 정도로 짜부라져 있었구나. 약속 장소에 도착해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사회 적응 훈련을 하는 듯했다. 지인들을 만나서 반갑기도 했지만 나에게 덧씌워진 우울의 기운 때문에 분위기가 칙칙해지는 건 아닌지 자꾸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집에 돌아올 때는 집 밖을 나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 뒤에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을 강남에서 만나러 갈 때는 더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다.  분명히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고, 만나면 반갑고 편안한데 그날은 밥을 먹고 2차로 카페에 갔을 때부터 기운이 달렸다. 친구들의 이야기에 집중이 안 되고, 얼른 집에 가고만 싶었다.  사회 적응 훈련은 실패였다. 바뀐 나에게 적응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자포자기의 문턱에서 친구 O가 나를 구했다. O는 음악회에 같이 가자고 했다.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어야 하고 이동하는 데 시간도 걸리니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많이 망설여지지만, 일단 들이댄다는 말에 용기가 났다. O가 나에게 초대의 말을 하기 위해 끌어낸 용기가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콘서트홀에서 오롯이 음악에 집중한 뒤 적응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그다음 주에는 혼자 영화를 보러 갔다. 성곽길을 오르며 여름을 보내는 동안에 아무리 애를 써도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데 체중 증량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기운이 생겼다. 다시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살아나서 여동생과 평일 오전에 음악회에 다녀왔다. 아직 자신은 없지만 좀 멀리 가 볼까 하는 마음에 친구의 차를 타고 가평의 <잣향기푸른숲>에 들렀다. 숲길을 거닐고 두부와 산채 비빔밥을 먹을 때까지는 좋았는데 집에 돌아올 무렵에는 지하철 객차 바닥에 철퍼덕 앉고 싶은 마음이 빗발쳤다. 역시 무리였나? 그래도 한번 더 시도했다. 3주 뒤 다른 친구와 포천의 국립 수목원에 들렀고 또 해롱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체중 증량 기간으로 잡은 6주가 끝날 즈음에는 저녁에 고음악 콘서트에 혼자 다녀올 정도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던 예전의 나로 돌아왔다. 이 지점으로 돌아오기까지 나에게 말과 선물로 격려와 지지를 아끼지 않은 친구들, 특히 나를 방에서 끌어내 준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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