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쥐마담 Apr 12. 2024

30. 업그레이드

나에게는 사진으로만 얼굴을 익힌, 미국에 사는 사촌 언니가 있다. 지난여름에 그레타 언니가 한국에 나왔다. 엄마와 이모, 여동생이 언니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를 마련했고 나도 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나가기가 싫었다. 사촌이지만 전혀 교류가 없이 지내던 사람을 만나서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눌 정도로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고, 안 쓰던 영어로 띄엄띄엄  말을 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무엇보다도 언니가 2010년에 유방암을 진단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만나기가 꺼려졌다. 대화 중에 암 이야기가 나오면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 같았다. 그래서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초대를 거절했다.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고 언니가 출국을 앞둔 즈음에 나는 잃어버린 체중을 되찾았다. 체중과 함께 마음도 넉넉해져서 여동생과 같이 언니를 만나기로 했다. 셋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동생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연스럽게 우리의 암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언니는 호르몬 양성 유방암으로, 나와 암종과 병기가 같았다. 언니는 암 수술을 하고 14년째 잘살고 있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비결은 운동이라고 했다. 운동? 나도 운동을 하긴 하지. 병원에서 하라고 하니까, 안 할 수 없으니까, 꾸역꾸역 하지. 그런데 변화는 별로 없지. 남들은 운동을 하면 없던 힘이 생긴다는데, 나는 있던 힘마저 없어지던데… 언니는 ‘매일’ 운동한다고 했다. 분명히 “에브리데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트라이애슬론”, 철인 3종 경기에도 나갔다는 것 같았다. 어떻게 매일 운동을 하지? 나는 일주일에 세 번 운동하기도 벅찬데.


언니를 만나고 돌아와서 지금까지 성곽길을 걸은 기록을 살폈다. 일주일에 3번 운동하기로 목표를 정했을 때는 한두 번 했고 5번 운동하기로 정했을 때는 3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동을 싫어하고 운동의 효과를 보지도 못한 나로서는 이 정도로 충분히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매일 운동하기로 목표를 높이면 5번을 하게 될까? 계절이 늦가을로 접어들었는데 평년과 달리 급작스럽게 추워졌다. 뼛골이 시리니 성곽길을 오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러다가 겨울이 되면 주 5회는커녕 3회도 못 하겠네. 그때부터 베란다에 놓인 실내 자전거를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저걸 타볼까? 


전에도 두어 번 탔지만 지루해서 넌더리를 쳤는데… 남편에게 부탁해서 실내 자전거를 거실 텔레비전 앞으로 옮겼다. 드라마라도 틀어놓고 보면서 타면 좀 덜 지루할 것 같아서 채널을 돌리는데 마침 <대장금>을 방영하고 있었다. 10km를 타겠다고 마음을 먹고 기어를 3단계로 조정하고 자전거에 올랐다. 처음 5분은 힘들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점점 <대장금>에 빠져들었다. 해악 하지 않은 옛날 드라마의 순한 맛에 익숙해진다 싶을 즈음에 온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성곽길을 걸었을 때와 비교하니 운동 시간은 1시간에서 30분으로 줄었지만 운동 강도는 두 배가 넘는 것 같았다. 내친김에 의자 스쿼트도 30개를 하고 스트레칭으로 마무리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실내 자전거를 타고 스쿼트를 했다. 일주일에 닷새를 운동하는 루틴을 만들려고 용을 썼다. 변화를 느낀 건 3주가 지나서였다. 운동을 끝내고 샤워를 한 뒤에 퍼지지 않고 주방으로 갔…다! 쌀을 씻고 나물을 데치고 국을 끓이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운동하면 생긴다는,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그 ‘힘’인가? 실내자전거에 붙어 있는 상체 운동기구를 건드려 볼 마음이 생겼다. 처음 5분은 시속 20km를 유지했다가 다음 5분은 상체 운동을 병행하면서 달렸다. 이 패턴을 반복하면서 10km를 주파하고 <대장금>이 <장희빈>과 <동이>, <이산>으로 바뀌는 동안에 스쿼트 개수를 조금씩 올렸다. 스쿼트 30개를 세 세트 반복해서 90개까지 하게 되었다.  


운동해서 생긴 힘으로 글을 쓰고 밥을 지었다. 지독한 글쓰기 슬럼프는 어느새 저만치 물러갔다. 더 놀라운 건 항호르몬 식사요법에 얼추 적응했다는 사실이었다. 아침마다 다섯 가지 이상의 야채와 달걀 두 개, 통밀빵을 먹은 지 1년이 되어 간다. 끼니마다 채소를 두 접시 먹고, 동물성 지방의 섭취를 줄이고, 단순당과 정제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식단에 안착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음식들을 멀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눌려서 슬프기도, 화가 나기도 했던 시간은 이미 과거가 되었다. 그 음식들과 거리를 두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거리감을 받아들인 것이다. 운동과 식단 관리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아니,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루틴이 되었다. 세끼를 온전히 챙겨 먹고 오후 2시나 3시, 늦어도 4시에는 반드시 운동한다. 암을 진단받았던 1년 전과 비교하면 상상할 수 없던 변화다. 오늘이 내 생에 가장 건강한 날인가? 여전히 항호르몬제의 부작용으로 불면증이 있어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받은 멜라토닌과 클로나제팜을 먹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1년 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암 환자일 것이다. 10년, 15년 뒤에도 재발하는 호르몬 양성 유방암의 특성을 고려할 때 나는 암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0기 암이므로 재발률은 적지만 가능성은 있다. 유방암이 재발하거나 전이되지 않더라도 애먼 곳에서 2차 암이 생길지도 모른다. 혹은 뇌졸중이나 심근경색, 치매처럼 다른 중증 질환에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원래 삶은 애매하고 불확실하다. 나는 암의 세계에 들어서면서 그 사실을 온몸으로 확인했다. 예측불허인 삶의 변수들에 눌리지 않으려면 지혜로운 이들이 말하듯이 오늘 하루만 살면 된다. 공들여 쌓은 루틴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질병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세를 교정해 준다. 암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암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삐딱한 자세로 살았을 것이다. 아서 프랭크는 <아픈 몸을 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이 의지를 발휘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고 증명하고자 하며, 이를 위해 건강이 필요하다. 반면 아픈 사람은 자신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자기 의지를 전혀 행사하지 않아도 세계가 이미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아픈 사람은 자유롭다.”


일이든 관계든 무언가에 나를 쏟아붓다가 중심을 잃으면 중심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쉼 없이 달린다. 하지만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몸에 발목이 잡혀 그 질주의 대열에서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다. 아서 프랭크가 말하는 ‘아픈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은 뒤로 물러난 사람이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일 것이다. 0기 암 환자로 1년을 사는 동안에 그 자유로움을 다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안달복달하지는 않게 되었다.    


지금 암 환자이든 아니든, 우리는 언젠가 모두 늙고 병들어 죽을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건강의 배신>에서 삶은 영원한 비존재 상태의 일시적 중단일 뿐이며 우리를 둘러싼 경이롭고 살아 있는 세상을 관찰하고 그것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짧은 기회일 뿐이라고 말했다. 영혼에 대한 논쟁은 논외로 하고, 우리가 맞이할 죽음을 떠올리면 오늘도 이 짧은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어쩌다 들어온 신비로운 세계를 좀 더 자유롭게 거닐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29. 최고의 선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