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이 새까맣게 타버렸고 다행히도 화장실만 그렇게 됐다. 온종일 잿더미가 된 공간을 치우느라 손톱 끝이 까맣게 됐고 거울을 보니 얼굴에도 시커먼 재가 군데군데 묻어서 어디서 방금 탈출한 사람처럼 보였다.
막연하고 서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럴 새가 없었다. 몇 시간 뒤엔 출근이었다. 아직 저 화장실은 쓸 수가 없으니 여러 군데를 검색했다.
호텔
에어비앤비
헬스장
게스트하우스?
지나가는 길에 매일 마주쳤던 동네 목욕탕.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 대중목욕탕은 가본 적이 없었고 기피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목욕탕은 단돈 구천 오백 원이니까! 깔끔하게 결정하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200m 앞 골목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여성전용 사우나 / 성인 9,500원 소인 4,500원
영업하세요 사장님?
어머 여기 열면 안 되는데, 아 아가씨야? 들어와요.
아니 많이 당해 가지고~ 남자들이 막 문을 열어. 들어와 들어와.
아, 집 화장실이 고장 나가지고요... 물이 안 나와서..
꽃무늬 민소매를 입은 사장님이 손짓을 하며 나를 안으로 들이자 훅 끼치는 사우나의 습기와 사람들.
본 것 중에 가장 작은 사우나 탈의실 공간에 딱 봐도 열명이 넘는 아주머니들이 왔다 갔다 하고 사장님 포함 네다섯 명은 출입문 바로 앞에서 바닥에 밥과 반찬을 펴놓고 식사를 하고 계셨다. 알몸으로.
발은 안에 들어와 있지만 스스로의 이질적인 모습에 사장님이 묻지도 않았는데 나는 여길 온 이유를 읊고 있었다.
세평 정도의 작은 탈의실이었다.
나의 모든 몸짓이 어색했다. 사물함키를 돌리는 것조차.
저, 수건은...
저쪽에 있어~
사장님 말고 다른 아주머니가 가리킨 내 한 뼘 거리 옆에는 수건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가씨는 목욕하러 온겨?
집 목욕탕이 고장 났대~
사물함에 옷을 넣고 바들바들 거리며 사우나 입구로 들어가자 마자 보인건 커다란 때밀이 침대, 타일 벽면 한쪽에 두 칸짜리 스텐 선반을 다 차지하고 있는 목욕 바구니들과 그 안에 들어있는 목욕 용품들. 총 열 군데 정도 샤워기 자리가 있었는데 한 두 곳 빼고는 다 개인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총총걸음으로 빈자리를 찾아 들어갔고 단출한 씻을 거리 일회용 샘플을 펼쳐 놓았다. 서서 샤워를 하는 형식이 아님을 파악하고 샤워기를 들고 쪼그려 앉아서 물을 틀었다.
버튼을 한 번 세게 누르면 나와~
뉴비는 어딜 가도 티가 나나... 탕에 들어가시던 분의 도움으로 물을 나오게 할 수 있었다.
뜨거운 물로 머리와 몸을 적시자 노곤해지고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사우나 안에는 냉탕과 온탕, 발 씻는 탕이 있고 온탕 안에 아주머니 여러 명이 모여 얘기를 하고 계셨다. 주위를 둘러 본 건 잠시뿐. 까만 재가 가득 끼어있을 게 뻔한 머리를 계속해서 박박 문질러 감았다.
몸에 물기를 닦으며 사우나를 나오자마자 음료 냉장고가 보였다. 아까는 어리바리해서 분명 못 봤었는데. 투명 유리 속에 쿨피스와 요구르트를 보자마자 목이 마르고 침이 고였다.
한 대 있는 드라이기와 작은 거울 앞에서 아주머니들이 아직도 한창 식사를 하고 계셨다. 챙겨 온 로션을 얼굴에 톡톡 바르고 수건으로 머리에 물기를 털고 식사 중인 사장님께 걸어갔다.
사장님 계산은 어떻게 해요?
아니 아가씨는 왜 벌써 씻었어?
아, 빨리 가야 해서 샤워만 했어요.
그래? 또 와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응 저녁때 또 와요 아가씨~
네 또 올게요!
각자 집에서 가져온 반찬으로 식사를 하시는 거 같고 재밌어 보이기도 해. 다 아는 사이신가 봐, 다들 가게 문 열기 전에 여기로 모이는 걸까? 단골이거나. 들어왔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곧 홀연한 느낌이 사라지고 만발한 벚꽃이 보였다. 꽃이 참 예뻐서 신났다가 집 가는 길에 타버린 화장실을 생각하니까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불이 나도 출근은 해야지. 난 어떻게 되려나, 이 화장실은 또 어떻게... 목욕탕에 또 가고 싶은 마음도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