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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풍 Feb 11. 2018

빈곤과 소득 불평등

자본주의에 대하여

초기 자본주의의 형태라 할 수 있는 중상주의는 15세기부터 18세기 동안 봉건제도가 무너지며 많은 유럽 국가들이 채택한 경제모형으로, 세계의부를 한정된 것으로 보아 한쪽의 이익은 다른 한쪽의 손해로 인식하는 ‘제로섬 게임’으로 보았다. [1] 이는 더 많은 금과 은을 얻기 위한 무한 경쟁을 야기했고, 제국주의 속 수많은 인류가 고통 받는 결과로이어졌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아담 스미스는 1776년 <국부론>을 발표해 당시 팽배했던 국가주의에 의한 소모적인경쟁에 몰입한 세계를 진정시키며 현대 경제학의 기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본주의 체제를도입한 국가들은 불평등, 착취, 빈부격차, 물질만능주의, 경쟁사회 등 다양한 문제를 경험한다. 그럼에도 많은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고수한 이유는 왜일까? 그건 시장경제가사회 전반의 빈곤을 퇴치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사회주의 체제 붕괴와 함께 자본주의가 인류의 빈곤 퇴치에 기여한다는 공식은 힘을 얻는다.


월드뱅크의 연구에 따르면 1820년 10억이었던 인구가 2015년까지 74억으로 늘어나는 동안 빈곤율은 빠르게 감소한다. 94%에 달하던 빈곤율이 80년대 초 44%, 2015년에는 9.6%까지 떨어졌다. [2] 물론 이 기간은 산업혁명과 화학비료의 발견 등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만 보더라도 자본주 경제를 도입하며 급속히 성장했다. 북한조차 최근 시장경제를 도입하며 경제 성장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자본주의가 빈곤을 퇴치한다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라는 지금 '빈곤'의 속성을 다시 한번 짚어볼 볼 필요가 있다. 연구에서 정의하는 빈곤율은 '굶어 죽지 않을 최소 기준, 하루 $2의 수입을 말한다. 이런 관점은 19세기 아일랜드 기근 때나 유효한 것으로, 현대 사회를 가늠할 지표가 될 수 없다. 먹고사는데 급급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 발전된 사회의 '인간적인 삶'을 충족시킬 빈곤의 재정의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의 빈곤의 정의는 어떤 기준으로 봐야 할까?



| 빈부 격차의 현 주소


자본주의의 본고장 미국의 상황을 살펴보자.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은 미국인 5,000명을 대상으로 경제 배분 구조에 대한 설문을 실시했다. [3] 미국 인구를 재산 순위로 20%씩 5개의 그룹으로 나누고, 각 그룹의 소득과 자산을 포함한 경제 배분 구조를 이상적인 수준, 예상되는 수준, 그리고 실제 조사 결과 세 가지로 나누어 비교한 것이다.


설문자의 92%가 생각한 이상적인 경제 배분 구조는 상위 20%가 전체 부의 35%를 차지하고, 하위 20%가 10% 정도를 차지하는 구조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10~20배 정도의 부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나라에 반영해보자. '88만 원 세대'나 최저임금 135만 원을 받는 수준을 빈곤층으로 정의하면, 부유층은 월 1~2천만 원의 수익을 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실제와 큰 괴리가 있을 것임을 예상 가능하다.


미국인 92%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부의 배분 구성


설문자가 '예상하는' 현재 미국의 부의 배분 구조는 좀 더 비관적이다. 설문 결과, 상위 20%가 60%의 부를 차지하고, 빈곤층과 부유층 간의 경제 규모 차이가 약 100배 정도가 될 것이라 답했다. 이 수준도 상당히 불평등하다 볼 수 있다. 하지만 중산층의 기준을 주택담보대출 조건인 부부합산 연봉 7000만 원으로 감안하면, 부유층이 이보다 6~7배인 연간 4~5억 원을 버는 것이 그친다. 왠지 이보다는 좀 더 할 것이라 예상된다.


미국인이 생각하는 현재 미국 부의 배분 구성


실제 통계 결과는 충격적이다. 상위 20%의 부유층은 미국 전체의 90%에 달하는 부를 차지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상위 1%가 전체 부의 4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주식이나 채권 등의 금융자산만 보면 50%에 달한다. 이 말은 하위 80%인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국 전체 부의 10%도 안 되는 부를 나누어 갖는다는 것이다. 빈곤층과 부유층의 격차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크게 벌어져 있고, 중산층이란 개념이 무색하다.


실제 미국의 부의 배분 구조


단순 근로소득만 따질 경우 미국의 상위 1%는 전체 소득의 24%를 차지한다. 30년 전인 상위 1%의 근로소득은 9%을 차지했다. 이런 현상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뿐 아니라 수많은 국가에서 발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2015년 기준 우리나라의 상위 1%의 소득은 14.2%, 그리고 상위 10%는 48.5%라고 한다. [4] 여기에는 초고소득자의 통계가 포함되지 않고, 자산 개념이 제외된다. 근로소득보다는 부동산 비중이 큰 우리 경제 구조를 고려하면, 어쩌면 미국 못지않은 경제적 불평등이 존재할 수 있다.


88만 원 세대나 아파트 경비원 등 저임금 노동자는 최빈국에서 굶어 죽는 수준이 아니므로 빈곤율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옳은 걸까? 빈곤이란 개개인이 속한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준이어야 한다. 200년 전 가난한 농노들은 매일 느끼는 배고픔을 통해 자신의 빈곤을 체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때보다 훨씬 높은 생활수준을 살고 있다. 굶지 않을 수 있으니 빈곤율에 포함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관점일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국민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나의 공동체에서 돈이 많든 적든 국가를 유지하고 존립시키는 것은 국민이다. 일을 하고 세금을 내는 것도, 사회 시스템에 협조하며 사는 것도 모두 우리 사회를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은 불평등과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불평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자칭 보수라 말하는 대한민국의 일부 세력들은 지난 수 십 년간 회자된 '양극화'나 '빈익빈, 부익부'에 대한 논의를 사회주의 선동이라 주장한다. 가난은 개인의 능력과 노력 부족이라 주장하며, 불공정 레이스의 현실을 숨기려 무던히도 노력한다. 그들은 한반도 분단에 따른 체제경쟁을 악용하여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자본주의가 한국의 빈곤을 퇴치했다는 허술한 논리를 갖다 붙인다.


인류가 발전시킨 지금 사회의 기술과 경제를 감안하면, 모두가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그림만 봐도 상위 1%가 약 10% 정도면 나누어도 15.1%에 달하는 절대적 빈곤층을 모두 구제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실제 북유럽 등 일부 국가는 이런 방식을 점진적으로 도입하여 성과를 보는 곳도 적지 않다.


소수의 착취 구조를 정당화하고 유지하려는 지금 우리 사회는 역사상 최악의 시기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간 써온 부끄러운 역사는 대통령 탄핵으로 수습되는 듯 보였지만, 2018년 2월 이재용 항소심 판결은 지난 10년 간 무너진 사회정의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집행유예를 낸 정형식 판사의 판결은 “역대급 쓰레기 판결”로 거론 조차 필요 없지만, 자본 독식구조에 귀속된 대한민국의 민낯은 탄식을 자아낸다.


2011년 미국에서는 138명의 백만장자가 의회로 몰려가 자신들의 세금을 올려달라 청원했다. [5]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소수 독식의 경제 구조가 결국 미국 사회를 망칠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의한 것이라 주장했다. 경영승계에 따른 세금을 피하기 위해 국민연금에 까지 손대는 한국의 재벌과는 크게 다른 모습에 부러움 반, 분노 반 묘한 감정이 생긴다.


“우리는 더 많은 세금을 내길 원합니다.
운이 좋아서 1년에 100만 달러(11억 3300만 원)
이상을 버는 사람들이라면 세금을 더 내야 합니다.”
- Patriotic Millionaires for Fiscal Strength -



| 소수 독식 사회


아담 스미스가 주장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개개인의 욕구"가 사회 전체의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준다는 논리는 현시점에서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당시 스미스가 전재로 한 사회 구조는 산업혁명 이전으로, 대량생산과 고용을 통한 자본이익의 개념이 퍼지기 이전이다. 당시 경제는 개인이 주체가 되어 분업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자신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경제 구조는 크게 다른 양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주체는 개인이 아니고 기업이다. 개인의 욕구는 일정 수준 충족되면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식욕을 가진 사람이라도 수십 킬로의 고기를 먹을 수는 없다. 하지만 기업의 자본증식 욕구는 무한하다. 성장 자체가 목적인 기업의 특성상 최대한 많은 부를 끌어들이는 것이 성공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욕구는 조직을 통해 개개인에게 전달되어, 개인으로써는 하지 못할 부정도 서슴지 않게 만든다.


기업윤리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인간이 음식 섭취를 포기하지 않듯, 기업은 자본 증식을 포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업에게 사회적 책임이나 윤리적 행동을 바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사자와 양을 한 우리에 가두고 사자에게 양을 먹지 말라는 말과 같다. 사자에게 엄청난 먹이를 줘 식욕이 전혀 안 생기게 하면 가능하다. 이는 '낙수효과'란 사기극의 발상이 시작된 논리다.


기업의 끝없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오랜 노력 끝에 우리 사회는 소수 자본에게 너무나 큰 파이를 넘겼다. 그리고 한번 넘어간 것이 저절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지금의 경제 구조는 큰 변화가 일어나기 전까지 지금과 같이 유지될 것이다. 기업을 통해 대규모 자본을 소수에게 빨아들이는 구조는 시장 자체를 붕괴시키는 결과로 초래할 수 있다. 물론 그럴 경우 경제구조 맨 아래층부터 무너지겠지만, 사회혁명의 역사를 보면 불평등의 압력이 극에 다를 때 시민행동은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나 OECD가 주장하는 '포용적 성장' 등이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우려를 바탕에 깔고 있다. 기업도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건강한 시장과 소비층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불평등 구조가 지속되면 소비층이 붕괴되고 시장이 줄어들어 악순환에 빠질 것이다. 소수의 부유층은 쌓아 놓은 부를 통해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사회가 무너지면 돈도, 권력도 무의미하다는 것은 프랑스나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수없이 증명된 진리다.


현대 사회에서 기업들이 경쟁하는 모습은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가 경쟁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200년이란 시간을 건너 또다시 각자의 이기심으로 주변 모든 것을 착취하여는 모습으로 회귀한 것을 보면, 이것이 인간은 본성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런 형태가 가능한 것은 사람들의 무지와 무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하기에 조금의 희망을 가져본다. 과거와 달리 지금 우리는 초연결 사회에 살고 있기에 잘못된 것을 감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하면 반드시 길이 열리는 것이 사회의 속성이다. 과거 왕이나 귀족, 그리고 독재자가 다수의 눈을 가리고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었던 것은 지식과 정보의 통제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일부 부정한 목적을 가진 세력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고,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기에, 멀지 않아 변화가 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2017년 10월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추문으로 미국에서 시작한 'Me too'운동이 서지현 검사의 폭로와 함께 한국에 상륙하며 큰 파장이 일었다. '꽃뱀논리', '색깔론', '맞고소' 등의 고질적인 문제와 한국 특유의 여성상에 대한 잘못된 시각 때문에 다소 더디게 진행된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하지만 권력에 의해 피해당한 사람들이 고립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공명하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기에 기대를 해본다.


자본 독식과 경제적 불평등의 경우 성차별과 달리 변화를 위한 이니셔티브를 찾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성폭력처럼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직결되기 때문에 편 가르기를 하거나 격렬한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피해자의 숫자가 워낙 크기 때문에 한번 발발하면 큰 파장으로 이어질 것이다.


박근혜 탄핵이 국민주권을 되찾는 행동이었다면, 경제적 불평등을 없애는 것은 경제주권을 되찾는 일이다. 따라서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굳어진 지금의 권력 구조로 많은 시간이 걸리 것이다. 정의의 마지막 보루라고 하는 사법부 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금 대법원장은 80년대 간첩조작 사건의 부장판사였던 양승태 대법원장이 있다.


2018년 2월 9일 자 '다스뵈이다'에 출연한 이정렬 판사는 이재용 재판의 부적절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현 사법구조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다. 사법부 조차 블랙리스트를 통한 철저한 관리를 통해 현재 대법관으로 임명할 중간 법관이 턱없이 부적한 문제를 지적했다.


괜찮은 사람을 고위직으로 보내려고 해도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지위에 있어야 하는데
지난 9년 동안 썩은 세월 때문에
여기(중간관리층)까지 사람이 가질 못했다는 겁니다.
여기(고위층)로 보낼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 이정렬 판사 -


이정열 판사는 이번 판결이 워낙 터무니없는 결론을 냈기에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인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법치주의에 100% 부합하는 판결이 나오는 것은 현재 "적폐 대법관"이 퍼져있는 상황에서 불투명해 보인다. 프로그램 진행자인 김어준은 지금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시민들의 지속적인 감시와 기다림의 시간이라 말한다. 미꾸라지가 흐린 물속에 바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오히려 미꾸라지를 잡기 힘들다는 의미일까? 한동안 맑은 물이 흘러 옥석을 가릴 수 있도록 맑아지길 기다려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런 상황은 비단 사법부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있을 것이다. 어쩌면 권력을 남용한 성희롱이나 경비원 강제 해고 등의 문제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빈곤층에서 벌어지는 생활고는 언론 등을 통해 표면화되며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소위 '중산층'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빈곤의 경계에서 착취당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



| 중산층의 위기


지난 2015년 1월 통계청에서 고소득자 기준을 중위소득이 아닌 초 고소득자의 금액이 포함된 평균소득으로 발표해 논란이 생긴 적 있다. [6] 발표에 따르면 평균소득인 4200만 원 기준 150%인 5500만 원 이상을 고소득자로 정한 것이다. 물론 2인 이상 외벌이 가구 기준이다. 여기서 의아했던 점은 5500만 원이 과연 고소득자인가 하는 것이다. 2018년 기준 해당 연봉의 실수령액은 387만 원이다. 이들에게 자신이 경제적으로 여유롭냐고 물으면 대부분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전세대출이자만 월 100만 원 이상을 내는 많은 서울 거주자의 경우 100%다.


10년 전 미국에서 일어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미국 경제의 불공정에 따른 결과였다. 2013년 발표한 다큐멘터리 'Inequality for All'에서 경제학자 로버트 리치(Robert Reich) 교수는 미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성장했지만 근로자의 임금은 제자리에 멈춘 것을 지적한다. 1970년대를 100%으로 보고 2010년 기준 생산성은 250%까지 올랐지만 노동자 임금은 40년 가까이 제자리에 멈췄다.


노동자 생산성과 임금 추이


그리고 우연히도 기업의 주가를 나타내는 다우지수는 같은 기간 크게 상승한다. 결국 근로자의 임금을 동결시켜 비용을 줄여 수익을 극대화시킨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매우 특별한 원리가 작동했다. 기업이 높은 수익을 내기 위해서는 소비가 필요한데, 임금을 줄이면 소득이 줄어 소비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리치 교수는 임금이 정체된 근로자의 소비가 줄지 않은 세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다우존스 지수의 급상승


첫째, 70년 대 후반 가계 소득이 부족해지며 생긴 여성의 직장 참여다. 전문직 여성이란 프로파간다를 통해 가사를 하던 여성의 노동시장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이 방식은 기업이 노동력 확보와 가처분 소득을 동시에 올리는 일석이조의 결과였다. 지난 10년 동안 맞벌이가 당연시 여겨지는 것을 경험한 대한민국의 현실과 매우 비슷한 느낌이다. 지금 결혼을 생각하는 신혼부부 중 경제적 여건이 아닌 다른 이유로 노동시장에 나가는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둘째, 올라간 물가와 동결된 임금의 차이를 매우기 위한 사람들의 선택은 초과근무와 부업이다. 우리의 경우도 월급이 부족해 불과 몇 만 원을 벌기 위해 대리운전을 하는 가장이 한둘이 아니다. 야근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대기업의 경우 초과근무 수당을 줄이기 위한 꼼수를 써 연봉을 많게는 20분의 1로 나눠 기본급을 최소한으로 줄여 지급한다. 지금 기업 내 만연한 치열한 근로문화는 어쩌면 생산성과 관계없이 자신들이 야근할 논리를 제공하기 위한 자기 위안적인 성격이 많다.


셋째, 노동력 공급에 한계를 느낀 사람들은 융자를 얻고 빛에 빠지는 것이다. 2007년 금융위기의 원인은 일반 시민들이 무분별한 판단으로 대출을 받아 벌어진 것이 아니고, 수십 년간 불평등의 압력을 행사한 소수 기득권의 횡포에 견디지 못해 터져버린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도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보인다. 리치 교수가 규명한 세 가지 상황이 무섭도록 빨리 전개되고 있다. 또한, 재벌 중심 경제, 부동산 투기 과열, 가계부채 급증 등 우리만의 고질적인 문제들도 한 다발 품고 있다.


OECD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30년 간 우리나라의 저축률은 30.2%에서 16.1%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7] 이 지표는 가계의 총 가처분 소득과 연금 증감액 대비 최종 소비 지출을 나타내는 것으로 금융 및 비금융 자산 취득 후 잔여분을 나타낸다. 이 지표가 감소한 것은 결국 주택마련과 물가상승에 비해 소득이 충분하지 않아 돈을 모을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는 지금과 같은 고령화 사회에서 노후대비라는 잠재적인 폭탄에 사람들을 무방비 노출시킨다.


국가 별 가계 저축율 추이 (OECD Data)


| 정당한 보상이 필요한 이유


자, 다시 돌아가 연 5500만 원을 버는 소위 '고소득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지금 그들의 삶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느낄까? 작년 한국일보의 기사에 따르면 요즘 직장인이 체감하는 은퇴연령은 50.2세라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28에 취업하면 결국 22년 정도를 근무하면서 12억 원 정도의 전(全) 생애주기의 수입을 벌게 되는 것이다. [8] 여기서 평균 서울 집값인 4.8억 원 [9]과 자녀 2명 기준 양육비 5.5억 원 [10]을 빼면 1.7억 원이 남는다. 세금이다. 지금 소득 수준과 사회 구조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과연 '삼포세대'라는 것이 그냥 젊은 사람들이 하는 푸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일까?


지난 10년간 정부가 저출산 대책으로 100조 원을 쏟아 부었다. 그 기간 보수당의 정책은 듣기 민망한 수준이다.  2016년 2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조선족 이민 확대, 2015년 10월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원장의 학제 단축을 통한 노동시장 조기 진출, 좀 더 거슬러 올라가 2014년 11월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싱글세 도입, 모두 문제의 본질과 동떨어진 겉핥기 정책이다.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문제의 본질인 개개인의 소득을 외면한 것이다. 그 정권이 무너진 것도 이런 오랜 불평등의 압력에서 나온 힘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알았다면 마음이 썩은 거고, 몰랐다면 머리가 썩은 것이다.


고령화 사회도 커다란 사회 문제 중 하나이다. 이 문제를 단순히 수명이 늘어 비 생산인구가 늘고, 그에 따라 생산인구의 부담이 커진다는 좁은 시각으로 보는 것은 그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인간의 기대수명이 늘어난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문제는 근로자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지 않고, 젊고 낮은 임금의 사람들만 선호하는 기업문화다. 요즘은 40대 중후반만 돼도 퇴직 걱정을 해야 한다. 이런 기업 문화는 노동력과 자본의 불공정 교환이고 사회 전반의 경제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중추 역할을 한다. 이런 불공정함 문제지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는 것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정부에서 지난 정부의 오물을 치우느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은 이해한다. 적폐 청산, 일자리 창출, 혁신 성장 등의 수많은 난제가 산적해 있고, 이번 정부가 실패하기 만을 바라는 자유한국당과 조중동 언론의 방해는 점입가경이 될 것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제대로 된 국정을 하는 길은 민심이다. 지금 시대의 민심은 국가 GDP나 경제성장률 같은 국가주의적 쾌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느끼는 소소한 일상에서의 삶의 질 향상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불공정 소득 구조를 정상화해서, 근로자의 생산성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 하나만 해결돼도 이번 정권은 많은 지지를 받을 것이다.



1. 초기 자본주의의 형태라 할 수 있는 중상주의는 15세기부터 18세기 동안 봉건제도가 무너지며 많은 유럽 국가들이 채택한 경제모형으로, 세계의 부를 한정된 것으로 보아 한쪽의 이익은 다른 한쪽의 손해로 인식했다.

2. Global Extreme Poverty - https://ourworldindata.org/extreme-poverty

3. "Wealth Inequality in America". Politizane. Youtube. 2012-11-20.

4. "2015년까지의 최상위 소득 비중". 통계 프리즘. 한국 노동연구원

5. "Patriotic Millionaires' Beg Supercommittee for Higher Taxes". ABC News. 2011-11-16.

6. "4200만 원? 3600만 원? 헛갈리는 중위소득". 중앙일보. 2015-09-23

7. Saving rate. OECD Data. Total, % of GDP, 1988 – 2015

8. "직장인 체감 은퇴연령, 평균 50.2세". 한국일보. 2017-09-20

9. "11월 전국 집값 더 올랐다… 서울 평균 집값 4억 8800만 원". 조선닷컴. 2017-12-01

10. "한국, 자녀 양육비 2억 7천500만 원". 뉴욕일보. 201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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