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차 비건. 채식을 시작한 계기와 그 불완전함의 기록.
게임체인저스, 도미니언
아놀드 슈워츠제네거, 호아킨 피닉스와 같은 유명 셀럽들이 참여해 관심을 모은 채식관련 다큐들. 두편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호기심, 건강이라는 순전히 자기중심적인 이유로 시작한 게 벌써 2월 15일. 의미있는 날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달력에 적어두었다.
첫번째 시도는 아니었다. 십대시절 이미 한 번 실패한 적이 있기도 하고, 식이장애도 있는터라 남들보다 느슨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극단적으로 가면 강박이 생길 나의 성격을 잘 알기에 나에게 조금은 여유를 주고 싶었다. 정말 먹고 싶을 때는 죄책감 없이 먹자, 라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한지 벌써 9개월이 되어간다.
신기하게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무심치 않게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고기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절대 안돼. 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먹고 싶으면 먹지 뭐 어쩌겠어 라는 편안함 때문인지, 더 생각나지 않았다. 입맛이 달라지고 냄새가 다르게 느껴지는 게 새로웠다. 매일 밤 치킨이 생각나던 나같은 닭고기 러버가 살짝 나는 고기 기름 냄새도 부담스레 느껴질 줄은 나도 몰랐다. 이래서 몇 십년씩 하는 사람들이 있나보다 싶었다. 육류도 좋아했지만 채소도 좋아했던 나의 식성과도, 건강한 음식을 선호하는 나의 오랜 식습관과도 아주 잘 맞았고 몸도 더 건강하고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정도면 금방 완전한 비건이 될 수 있을 것같은 기대감이 부풀어올랐다.
입맛은 달라지고, 후각은 더 예민하게 깨어났다.
그렇지만, 여지없이 흔들림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추석에는 우리 손녀딸 좋아하는 닭가슴살 실컷 먹으라고 큰 닭으로 했다는 할머니의 애정어린 말에 흔들렸고, 바다에서 나는 고기가 간절히 생각날 때는 참지 않고 먹는다. 아무 생각없이 떠먹은 육수에 고기맛이 느껴졌을 때에 차마 뱉어내지는 않고, 요거트를 포기하지 못해 유제품도 엄격하게 끊어내지는 못하였다. 이건 완전히 불완전한 채식 이다.
최근에 알게된 사실에 따르면, 새우를 먹는 것보다 소고기를 먹는 게 온실가스를 덜 배출한다. 멕시코에서 농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생각하면 아보카도를 먹을 수 없다. 비건 대체육을 생산한답시고 공장을 돌려도 여전히 온실가스는 배출된다. 어느 것도 완전하고 완벽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영양학적으로도 아직 여러 도전과 시도를 하고 있다. 올림픽 선수처럼 영양사가 따라다니지 않는 이상 '게임체인저스' 같은 다큐가 말하는 만큼 영양적으로 육식보다 더 나은, 건강에 좋은 식사를 하기는 매우 어렵다. 십대시절 이미 채식에 도전했다가 탄수화물 의존도가 너무 높아져 빠른 포기를 했던 사람으로서 이번엔 좀 더 지속가능한 채식을 하고 싶다. 그렇게 하려면 정말이지,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 의식적으로 탄수화물을 적정량으로 제한하고 영양적으로 결핍된 부분이 없기 위해 신경쓰는게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처럼 음식 강박이 있는 경우 의식을 의식 차원에서 머무르게 하고 강박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도시 중에서도 서울에서 생활하다보니 채식을 실천하기 매우 유리한 환경이긴 하지만, 여전히 옵션은 육식주의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며 채식에 대한 인식 수준이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비건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도 까마득하다. 하지만 현재 불완전한 채식을 하고 있다며 당당하게 말하는 누군가의 글을 보고 문득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도 당당한 불완전한 채식주의자다.
누군가는 나에게 무슨 비건이냐며 손가락질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아감에만 집중해본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귀를 닫고,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지만 온힘을 다해 살피기로 다짐한다. 흔들리고 또 흔들릴지라도 멈추지는 않기로.
엄격한 비건인 앞에서 괜시리 기죽던 마음, 닭고기, 돼지고기와 같은 공장에서 생산된다는 제품 포장지에 적힌 글을 읽으면 죄책감이 들던 마음을, 조금은 덜기로 했다. 나도 당당한 불완전한 채식주의자다. 대한민국에서 불완전한 채식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