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장마 때문에 통 매미 소리 듣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잠시 비가 멈추고 해가 나면, 기다렸다는 듯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주말 오후, 비 그친 틈을 타 딸아이와 산책길에 나섰다. 공원길을 따라 걷는데 반 발자국 앞서 가던 아이가 길을 멈추고 뭔가를 들여다본다. "아빠, 저게 뭐야?" 아이가 가리킨 나무를 바라보니, 매미가 탈피하며 벗어놓은 허물이 붙어 있었다. 나무 밑 둥에서 여섯 뼘 쯤 타고 올라와 매미가 되어 날아간 모양이었다. 왜 껍데기만 달랑 붙어 있는지 궁금해 하는 아이에게 굼벵이에서 시작하는 매미의 생애에 대해 알려 주었다.
"그럼 쟤는 일주일 살려고 땅 속에서 7년이나 기다린 거야? 불쌍하다..."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을 다시 들여다보는 아이를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매미가 불쌍한 걸까?
한동안 매미의 생애는 동기부여에 관한 책이나 강의의 단골 소재였다. '무엇이든 이루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매미도 7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매미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라는 이야기 말이다. 이솝 우화처럼 정형화 된 이야기이지만, 문득 든 의문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게 정말 맞는 말일까?
정말 그렇다면, 매미의 삶은 너무나도 불행하기 짝이 없다. 겨우 일주일, 단 7일을 위해 7년의 시간을 땅 속에서 보내야 한다니. 게다가 자신의 삶을 위한 것도 아니고, 종족 보전을 위한 번식을 목표로 7년의 시간을 땅 속에서 희생하다니. 너무나도 불행한 삶 아닌가. 이런 예화가 정말 맞는 것일까? 아니, 굼벵이는 매미의 삶 7일을 위해 7년을 버티는 것이 아니다. 굼벵이는 단지 굼벵이로서의 삶을 7년간 살아왔을 뿐이다.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굼벵이 자체의 삶을 살아낸 것이다. 매미는 굼벵이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매미 이야기는 학생들에게, 특히나 사회 초년생들에게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많이 주입되는 예화다. 그간 우리는 "너희들의 미래에는 멋진 삶이 기다리고 있으니, 지금은 참고 견디라"는 강요 아닌 강요를 해 온 것은 아닐까. 어쩌면 굼벵이에겐 땅속의 7년이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참고 견디고, 버티는 시간'이라 정의내린 것은 우리들이다. 성공과 완성, 결말이 중요한 지극히 인간 중심의 사고다.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현재를 무의미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굼벵이는 매미의 삶을 위한 받침이 아니라, 굼벵이 그 자체의 삶으로서 의미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만, 매미가 되었을 때 매미의 삶도 충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주어진 굼벵이의 삶에 그냥 만족하자는 말이 아니다. 지금 현 상태의 모습 그 자체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청춘은 버티는 시간이 아니다. 견디고 참다가 나무위로 올라가 일주일 죽어라 운 뒤에 스러지는 매미가 청춘의 종착역인 것도 더더욱 아니다. 청춘은 매 순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청춘이다. 굼벵이는 매미를 꿈꾸게 하는 도구도, 매미의 아래 단계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