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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inkDolphin Feb 16. 2019

내가 떠나는 날

만남을 끝내고 기다림을 맞이하러 가는 길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들어오는 건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창문. 아, 아직도 비가 오나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캘리포니아는 영 익숙치 않다. 지금 나는 실험실에 있는 너를 기다리며 학교 도서관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쓴다.


어제는 너와 4년만에 처음 보내던 발렌타인 데이였다. 늘 밤 12시 정각에 맞춰 'Happy Valentine's Day' 라며 문자 대신 나를 꼭 안아주던 네가 있어 행복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누구보다 진부한 발렌타인 데이를 보내게 해주겠다며 큰 장미꽃다발을 안고서 쇼핑몰 전체를 누비게 하던 네 미소가 늘 생각날거야. 계속해서 내리던 장맛비에도 우산을 들고 내 어깨를 감싸주던 네 손길도 늘 생각날거야. 비행시간까지 10시간. 그 10시간 동안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너를 보낼 준비를 해야할까.


비 오는 캘리포니아와 발렌타인 데이. 네가 준 장미꽃에 머물던 사람들의 눈길이 늘 생각날거야.




곧 공항 입국장에 서면 확실해지겠지만, 이번 이별은 더욱 특별할 것 같다.

"We will figure something out." 입버릇처럼 반복하던 그 문장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알아. 이 이별 뒤에 어떤 만남이 찾아올까. 이전 이별에서 우린 그 답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이별은 다른 것 같아.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결정은 언제 어디서 볼 지가 아니라, 우리가 다시 볼 것인지를 이야기해야겠지. 너는 박사 학위를 하러 미국 어딘가로, 나는 학업일지 커리어일지 모르는 그 어중간한 삶의 길목에 서서 모든 걸 손에 쥘 수 없다는 걸 배워야겠지. 그게 너와 함께하기 위해 내 가족을 떠나는 것이던, 내 일을 떠나는 것이던,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던 말이야. 어느 날 아침엔 모질게도 다신 너를 못 볼 수도 있다는 말을 꺼내다가, 나를 보며 웃는 너의 미소에 다시 돌아서기도 하고, 너와 함께하는 삶을 상상해보다가 몸이 아파서 일을 그만 둔다는 엄마의 문자에 다시 이별 채비를 하는 내 상황에 힘빠진 웃음이 났다. 20일이 20년 같기도 했고, 20초 같기도 했어. 그 시간동안 나는 천국와 지옥을 모두 다녀왔지.


"What should we do?"


정적이 흐르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나는 뭘로 채우고 싶은걸까.




도서관에 앉아 인터넷을 둘러보다가 오랜만에 페이스북에 들어가봤더니, 내가 4년 전 유타에서 카우치서핑을 했던 가족의 글이 맨 위에 올라와있더라. 내게 나흘간 영화관 딸린 집을 내어주고,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며 나를 브라이스 캐니언으로 데려갔던 예쁜 가족들. 캐리어 하나만 들고 두 달동안 떠돌아다니던 스물 세 살의 나를 흔쾌히 집으로 초대해줬던 Dan이 어제 세상을 떠났다는 글이었다. 지난주 뇌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는데 합병증으로 하늘로 떠나가셨다는 소식. 마지막으로 집에서 아침을 먹는 사진이 같이 올라왔는데, 내가 그 가족들과 함꼐 뒷마당에서 딴 복숭아로 잼을 만들던 테이블이 그대로였다.


나흘이면 정말 짧은 시간인데, 왜 이토록 기억이 선명할까. 나는 왜 지난주에라도 이들에게 잘 지내냐고, 나를 받아줘서 고마웠다고 짧은 메세지 한 번 보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Dan이 영영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감사한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텐데. 오랫동안 알았던 이도 아닌데 마음이 너무 저릿해서 한동안 이들의 행복한 가족사진을 멍하니 쳐다봤다. 사랑하는 이들을, 특히나 너무나도 어린 아이들을 두고 먼 길을 떠나야했던 그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 행복한 미소를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이 세상에 두고 가야만 하는 기분이 어땠을까.


너와의 이별을 앞둔 오늘, 나는 또 다른 이별을 맞고 싶지 않았는데.




너의 연구실 동료들과 저녁을 먹다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할거냐는 질문에 내가 대답을 얼버무렸지. 화개애애한 대화가 오고 가던 중 네가 화장실에 가자마자 네 친구가 내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어.


"Can you let him go?"


별 질문도 아니였는데, 정말 당황스럽더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게 있다고 너를 보내야하는지, 나는 너와 함께하기 위해 뭘 포기해야 하는지, 그리고 널 보낸다는 건 어떤 의미일지. "I can't."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입이 안 떨어졌어. 널 보내고 싶지 않은데 보내지 않을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어. 지금 도서관에 앉아있는 누군가가 다시 묻는대도 아마 대답 못 할 것 같아. 스물 여섯이 된다는 게, 너와 함께하는 4년 뒤에 이렇게 어려운 결정이 있을지 누가 미리 알려줬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그 끝이 언제가 되었던, 너와 함께한 모든 날들이, 도서관에 앉아 내게 올 너를 기다리는 평범한 오늘이, 차 안에서 함께 노래를 따라부르며 웃던 날들이 내게 가르쳐준 모든 것들을 나는 늘 기억할거야. 이별과 기다림의 길목에 서서 이 글을 쓰던 순간을 추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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