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기
낯선 도시, 분명 내가 사는 곳이 이곳 어디인데 낯설게 느껴지는 이곳을 허둥허둥 헤매고 있다. 이곳 어디인데... 그곳은 거기였다. 지금은 오래전 이야기. 내 열정과, 배고픔과, 아픔과, 환희가 공존하던 20대 초반에 살던 그 서울 변두리 도시 어느 즈음.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가는 그 낯설고 낯익은 혼란의 공간 속에서 집을 찾느라 헤매고 또 헤매고 있다. 마치 치매가 걸린 노인이 된 것처럼, 아니면 기억을 상실한 아까운 젊은이가 된 것 같이. 처음엔 만만했다가, 무서워지고, 혼란스럽다가 슬퍼지는 그 꿈을, 나는 또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 꿈속의 나 자신처럼, 몽롱하고 희미한 나의 나날들이 길어지고 있다. 한 줄 글을 쓰는 것조차 어렵기만 한 그날이 마침내 온 것이다. 달릴 수도 없고 멈춰 설 수도 없는 정체된 고속도로 위에 있는 초보운전자처럼 허둥허둥 나는 한 줄의 글을 쓰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가, 체념했다가, 그렇게 익숙해져 연재도 이어가지 못하고 인생에서 해보지 않은 일탈 아닌 일탈을 하고 있다.
가을하늘은 어느덧 겨울 냄새를 뿜어대기 시작한다. 작열하는 여름 40도의 열기에도 꿋꿋하게 글을 써대고, 공모전을 찾던 나는 어디로 사라지고 갑자기 10년은 늙어진 듯 생각과 달리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억지로 글을 쓸라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다가, 살짝 기계의 힘을 빌려볼까 흔들리다가 차라리 쓰지 않겠다를 선택하고 나는 평생에 처음으로 게으르고 게으른 글쟁이가 되었다.
글은 지구상에 있는 내 유일한 친구이다. 글은 때때로 어느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어린애 같은 내 감정도 알려주었고, 덕분에 다른 사람들에게 화풀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시작한 그림일기는 충분히 타인의 눈을 의식한 글이었기에 또 다른 가식을, 포장을 해야 했던 슬픈 글쓰기 이기도 했지만, 기록으로써의 가치를 배울 수 있었다. 청소년기에 나의 일기장은 분노와 슬픔, 후회와 용서, 그리움과 체념의 푸념으로 가득했지만, 반항을 허용하지 않는 환경에서의 작은 나에게는 내가 진실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이기도 했다. 어른이 되면서 나의 일기장은 온갖 기도로 가득했다. 세상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 없이 이 한 몸 죽으면 행복한 천국이다 생각하며 당당했던 10대의 나는 사라졌다. 지킬 것이 생기면서 지질한, 하지만 자존심을 다 내어놓은 기도로 가득했다. 결혼과 함께 시작된 가족, 부모님, 남편과 아이들...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나는 날이 혹시라도 빨리 오는 것도 두려워진 거다. 나는 내 아이들이 독립하고 나를 의지하지 않을 때까지 건강히 살아서 아이들과 가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잃을게 생기면 두려움이 커진다. 아무것도 없던 내 자유의 야성은 점점 더 소심해지고, 지키기 위해 남에게 치사해지고,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감을 느낀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되기 전부터 본질이던 영혼의 자유는 점점 철창 속에 갇혀버리고, 세상의 알 수 없는 가치와 질서 속에 익숙해져 가는걸 아무 대책 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다 자랐다. 아이들은 수시로 조언과 돌봄을 원하지만 그들은 이미 각자의 삶을 살아낼 만큼 자랐고, 어떤 면에선 나보다 이 세상을 지혜롭게 잘 살아간다. 50년을 넘게 살아도 노련하지 못한 나의 삶은 전학생의 첫날처럼 늘 어색하기만 하다. 그 상황을 함께 있어준 나의 글. 글쓰기. 때로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수필이 되어 누구한테 이르지 못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는데, 또 나는 공개된 글을 쓰면서 다시 써야 할 글과 써서는 안 되는 글을 재고 있는 것이다. 두서없이 얽혀있는 내 글을 깔끔히 정리된 누군가의 글, 전문적인 지식이 빛나는 글들과 비교하고 있는 걸 보며... 내 평생의 친구인 내 글이 위축되고 서러워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세상에 발이 묶이고 삶이, 물질이, 질병이 , 아픔이 가득한 세상에 갇혀 공식대로 모든 걸 해결하고 살아야 하는 운명이지만, 내 글만큼은 자유롭고 행복했고 아무 제한도 필요 없는 즐거움 그 자체였는데, 조금씩 어려운 작업? 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아마추어다. 이런 마인드는 글로 성공할 수 없는 마인드다. 나는 결정한다. 프로가 될 수 없어도 내 글의 세계만큼은 좀 산만하고 거칠고 무지해도 자유로운 행복으로 그냥 놔두자라고.
그래서, 결국 아무도 내 글을 봐주지 않는다 해도 나는 그 속에서 나의 글들과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얼굴로 어는 누구도 비교하지 않으며, 통장에 잔고를 글과 연결 짓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그 의리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어리숙한 글을 좋아해 준다면, 나는 그들과 서로의 글을 친구 삼아 조금 덜 외로운 아마추어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로 인해 거친 글이 책이 되고 통장에 숫자가 글로 인해 채워진다면 그건 너무 행복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누군가에게 더 마음에 들기 위한 지구고 지우고 다시 써서 결국 내 색깔은 남아있지 않은 그런 글은 쓰지 말아야겠다 다잡아 본다. 물론 나는 모른다. 또 어떤 깨달음이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어쨌든 나는 내 글과 함께 마지막까지 가리라는 걸 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향해 힘차게 날아갈 것이고, 어른들도 순서는 모르지만 하나 둘 떠나게 될 것을 알기에 그 모든 인연마저 글에 남겨놓아야 하니까.
멋진 글에 대해 알 수록, 배울수록 멀어졌던 나의 글쓰기는, 그냥 시골구석에서 끄적대는 글로 그냥 두기로 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냥 낙서일 뿐이다.
그런 끄적임이 나의 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