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사천, 박연묵 교육박물관 관장 박연묵
"가희가? 잘 있는가 해서 전화해본다."
"내가 요즘에... 하고 있는데... (중략)"
"그래 잘 있고... 자, 끊습니다."
박연묵 어린이는 자신이 공부한 교과서와 학습 관련 자료를 버리지 않고 보존했습니다.
박연묵 선생님은 자신이 가르친 학습교재와 포스터, 현수막들을 보존했습니다.
퇴직교원 박원묵 관장님은 그동안 자신이 모은 교과서, 학생들이 쓰던 자료, 선생님들이 활용한 학습교재, 교구들을 모아 경남 사천, 관장님의 집 거의 대부분의 공간에 그 기록들을 전시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관장님의 공간을 방문했고 경남교육청과 진주교대에서는 협약을 맺었습니다. 국가기록원에서는 관장님의 기록을 전시하고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관장님의 화려했던(?), 활동적이며 열정적인 그 시절 끝자락에 관장님을 만났습니다.
관장님의 기록에 대한 진심을 보았고 사람에 대한 따뜻함도 느꼈습니다.
그리곤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만남이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특히 고령의 관장님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가끔 관장님은 부족한 제게 안부를 물어주셨습니다.
관장님을 소재로 한 글(네모의 기록이야기/두 남자 이야기)을 보내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관장님은 너무나도 좋아하셨습니다. 기록을 하신 분이 기록되셨으니 말입니다.
"가희가? 네가 보내 준 책을 복사해서 000에게 보내고 있다"
"가희가 태어난 곳을 지도로 찾아봤다..."
"그래 잘 있고, 자, 끊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하던 중 딱 한번 관장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교원 합격자들이 박물관에 현장학습을 오곤 했는데 지금은 주민들도 불안해하시곤 하셔서 못 온다고.. 아쉽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시간 마스크를 썼지만 고령의 관장님에게 혹시나 문제가 생길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관장님을 서둘러 뵙고 박물관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저는 코로나에 확진되기도 하는 등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며칠 전, 관장님은 늘 동일한 음성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가희가? 내가 영 몸이 좋지 않다"
"병원을 가봐도 원인은 모른다고 하고, 한의원에 가도 차도가 없다..."
"그래 잘 있고 자, 끊습니다."
여전한 목소리여서 크게 아프실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모든 만남에는 시기와 때가 있다는 생각에 서둘러 박물관을 찾았습니다.
조용하고 편안한 걸음을 걸으시던 관장님은 걷지를 못하고 있었고, 이곳저곳 설명을 해주시면서 가리키던 손가락은 더 이상 수저도 들지 못하고, 단추를 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발과 손은 부어있었고 몸은 쇄약 해지셨습니다. 다만, 관장님의 생각과 목소리만은 여전하셨습니다.
"내 나이 89세, 원인을 찾을 수도 없는 병이 왔는데, 생각해보니 이 박연묵의 수명이 이때 까진가 보다"
"중요한 기록물은 진주교대에 기증을 했고, 장기간 써 온 일기장도 진주교대로 보내기로 했다."
"나머지 남은 것도 교대에 가지고 가기로 했고, 그런데 그렇게 해도 남은 기록이 많은데 ,,,,"
"지난번에 기록물을 더 보존하려고 만든 또 하나의 서고도 짓다가 중단되고.."
그러시고는 같이 온 분들에게 본인이 걸을 수 없으니 제게 설명을 부탁하셨습니다. 저는 관장님 손길이 미친 곳곳을 설명해드렸습니다. 지난번과 달리 상당량의 기록물은 이미 비어진 상태였지만 남은 기록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은 되었습니다. 그리곤 관장님의 것은 아니었지만 마을의 보호수도 설명해드렸습니다.
관장님이 늘 자랑스러워한 마을의 보호수(소나무/350년)와 관장님의 기록공간
관장님은 경남뿐만 아니라 전국에서도 드문 중요한 교육기록을 오랜 시간 안전하게 보존 관리하신 분입니다. 돈이 되지 않을 기록을 애장 하셨고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그러나 관장님의 사모님은 "내 말은 살면서 하나도 안 들었다고,,,, "웃프게 말씀하셨지만 남편을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 말에 관장님은 여자의 모성애를 설명하시면서 잠시 웃기도 했습니다.
관장님은 왜 기록을 관리하셨을까?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저는 관장님이 자랑스러워한 나무와 관장님의 오래된 집(1943. 9. 17. 상량) 그리고 관장님의 주름살과 부은 손, 발도 보았습니다.
" 기록에 대한 대자대비"
실용적인 것을 최고로 여기는 지금,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을 애장하고 그것들을 무상으로 기증한 이유를 이 말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싶어 졌습니다. 관장님의 화려한(?) 시절에 관장님의 박물관을 방문했던 많은 사람들이 관장님을 찾아뵙기를 소망합니다. 건강하셨던 관장님을 찾아뵈었을 때는 뵐 수 없었던 사모님께서, 관장님께서 아프시니 오시는 분들을 너무나 고마워하시곤 먹을거리를 챙겨주셨습니다.
그래서 더 슬펐는지 모릅니다.
관장님의 겪고 있을 그 어떤 것 보다, 곁에서 관장님을 바라보시는 사모님이 관장님의 건강을 기원하며 더 사람들을 기다리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이제는 본인의 생이 끝나간다는 말씀을 하시는 관장님께
"건강 회복하셔서 저와 같이 기록 관련 일을 하셔야 한다고" 웃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이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박연묵 교육박물관과 박연묵 관장님을 찾아뵈었던 여러 분들이 관장님을 찾아뵙고, 관장님의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그의 기록에 대한 대자대비가 지속되기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다시 건강을 회복하셨을 때 관장님이 자랑스러워한 노송 앞에서 기록을 전시하는 특별한 행사를 해보기를 젊은 기록인이 소망해봅니다.
관장님의 연세는 많지만 마음은 여전히 젊은이입니다. 관장님 기운 잃지 마세요.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