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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Jan 17. 2022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누구나 살면서 어려운 시기를 겪는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삶이 대개 그렇듯 모든 것이 명확하게 시작과 끝이 나눠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있을 때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되짚고 해결책을 찾아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동시에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끈적하고도 질긴 고리들을 이해하면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스스로 "우울증"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우울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들 중에서 내가 접근 가능한 것들에 손을 내밀었다. 그중 하나는 상담이었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개인 상담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결과적으로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낯선 이에게 내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털어놓는 것이 내겐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갖고 있던 문제는 나름의 실체가 있었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해결이 아닌, 당장 힘든 마음만 그러모으려고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작 내가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상담사가 내놓은 답변은 쉽게 말해 "모든 것을 다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한정된 에너지를 적절히 분배해서 사용하라"였다. 

솔직히 말해 화가 났다. 이제 와 저 말을 다시 바라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맞는 말이 다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혼자 있을 시간이었다. 상황은 나를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도 없고 계속 나아갈 수도 없는 시간들이 지나고 보니 상황이 조금씩 달라졌고 이제 나에게 조금의 시간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젊은 여성들의 우울증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다룬 책이다. 광범위한 우울이 아닌, 나와 같은 또래 여성들의 우울을 다뤘다는 점에서 이야기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와 공감이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리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새로 써 나가는 경험을 통해서만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 상황이 나아진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고 또 다른 이름을 붙여보자면 "번아웃"이 함께 왔던 것 같다. 무기력과 허무를 번갈아 왔다 갔다 했다. 세상에 내가 좋아한다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무엇도 재미가 없었다. 슬픈 이야기를 읽어도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어도 나와 무관한 것처럼 조금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내가 알던 나, 그동안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내가 아니구나. 그런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당시에는 매우 충격적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그 시기가 있었기에 나는 타인의 아픔에 조금은 무관하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어야 한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내가 다를 감당하는 것이 버거웠던 때.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님을 다시 떠올린다. 나처럼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가만히 쥐여주고 싶다. 

아래는 수없이 많은 밑줄을 긋고 여러 번 다시 읽고 손으로 써본 글귀 중에 하나이다. 



분노의 정체를 명확히 밝히고 이를 말로 표현하는 과정, 이것은 혼자서 하기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다른 이야기들과 내 이야기가 일치하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홀로 분노 혹은 우울을 느낄 때 우리는 나의 감정을 믿기보다 세상의 판단을 믿게 된다. 내가 미친 걸까? 괴상한 걸까? 예민한 걸까? 우리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재해석할 자원은 물론, 고통 속으로 함께 들어가 공감하며 이야기를 나눌 관계가 절실하다. 
하미나,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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