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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Nov 15. 2022

삶과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비비안 마이어 전기>보모 사진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현상하다

원제 VIVIAN MAIER DEVELOPED: The Untold Story of the Photographer Nanny

By Ann Marks


비비안 마이어를 처음 만나다

“비비안 마이어”라는 매력적이고 미스터리 한 인물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랬듯 그 인물의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와 현상도 하지 않은 채 남긴 수많은 작품에 매료되었다. 그 사진들을 보며 나 자신을 보았다. 나 역시 그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었다. 비비안 마이어에겐 내게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대범함과 끈기, 집작에 가까운 몰두와 재능이라 불리는 어떤 것. 반가웠다. 내가 보고 싶었지만 다가가지 못했던 세상에 용기 있게 걸어 들어가 순간을 담아 시간을 건너 여기에 펼쳐 보이고 있는 사진작가의 존재가.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 Finding Vivian Maier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로 처음 이 베일에 싸인 예술가를 만났다. 비비안은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었으나 생전에 발표한 적이 없었고 평생 자신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며 보모 일을 했다. 비비안의 작품들은 말년에 창고 보관료를 내지 못해 그 안에 보관된 물건들이 경매에 나오면서 세상에 처음 나왔다. 시카고에 대한 책을 준비하던 청년 존 말루프가 낙찰받았다. 사진에 문외한이었던 낙찰자의 눈에도 그 사진들을 마음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방형의 흑백 사진들을 인터넷에 올리자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존 말루프는 사진을 찍은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함께 낙찰받은 수없이 많은 물건들과 스스로를 찍은 사진을 통해 사진가의 이름과 얼굴을 겨우 알게 되나 어디에서도 구체적인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비비안 마이어란 이름을 가진 미스터리 한 여인. 그 이름을 다시 발견한 건 신문의 부고란 이었다. 그러니까 존 말루프가 비비안 마이어의 작품을 입수했을 때, 그녀는 시카고 어딘가에서 말년의 삶을 보내고 있었던 것. 하지만 비비안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존 말루프는 보모였다는 비비안을 생전에 알았던 사람들의 찾아 그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평생 혼자 살며 작업을 했던 예술가의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이 일련의 이야기가 매력적인 것과는 별개로 생전에 비비안을 알았던 사람들의 인터뷰 역시 인상적이었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그녀의 흔적이나 삶을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비비안이 찍은 사진과 사람들의 이야기뿐이다. 생전에 가족도, 길게 교류한 지인도 없었던 탓에 사람들은 각자가 기억하는 특정 시기의 비비안에 대한 기억을 말로 풀어낸다. 그것들을 다 종합하면 맞춰질 것 같았던 퍼즐은 오히려 비어있는 더 큰 여백을 마주하게 된다. 그들의 말은 모순 투성 이이다.


미국인/프랑스인, 권위적인/소극적인, 배려하는/냉담한, 여성적인/남성적인, 재미있는/엄격한, 너그러운/고집 센, 쾌활한/냉소적인, 깔끔한/지저분한, 친절한/심술궂은, 열정적인/둔감한, 매력적인/심각한, 정중한/퉁명스러운, 책임감 있는/무신경한, 사교적인/비사교적인, 페미니스트/전통적인, 눈에 띄는/은둔하는, 메리 포핀스/사악한 마녀
— 비비안 마이어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묘사한 비비안의 모습
앤 마크스, 비비안 마이어, 11p

도대체 비비안 마이어는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이토록 멋지고 따뜻한 시선이 담긴 사진을 찍었음에도 공개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 것일까? 커다란 의문이 남은 채로 영화는 끝난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내 마음에 깊이 남아 비비안이 찍은 사진과 책을 찾아보게 만들었다.


내가 비비안 마이어란 인물에 궁금증과 애정을 동시에 갖게 만든 사진이 한 장 있다. 그녀가 남긴 자화상 사진 중 하나이다. 카메라라는 물건을 손에 든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비비안은 수없이 많은 셀피를 남겼다. 재미있는 건 50여 년이란 시간 차이다. 지금 우리는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고 공간의 제약 없이 사진을 저장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기에 마구 찍어댄다, 나의 모습도 일상의 작은 사건들까지도. 비비안이 카메라를 처음 손에 넣어 찍기 시작한 1950년대에는 지금과 너무 달랐다. 카메라는 비싼 기계였고 찍고 현상하고 확인하는 것까지 물리적인 시간과 돈이 들었다. 비비안은 모든 사진을 현상하진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사진을 찍었다. 심지어 영상과 녹음테이프도 남겼다. 마치 자신의 존재와 흔적, 시간을 누군가에게 어딘가에 남기려는 듯. 꾸준하고 점점 발전하는 실력을 담아.


자화상 속 비비안의 모습은 대부분 근엄하고 표정이 없다. 대신 매우 다양한 기교를 활용해 자신의 모습을 담는다. 앞뒤로 놓인 거울 사이에서 여러 상으로 맺힌 모습을 담기도 하고, 풀밭 위 그림자나 쇼윈도에 비친 모습이나 자동차 사이드미러에 비친 모습도 다양하게 변주되며 담겨있다. 놀랍게도 우리 모두 그런 사진들을 하나쯤은 찍어보았을 것이다. 풍경 속, 세상 속 어딘가에 위치한 자신의 모습을 항상 손에 들려있는 작고 가벼운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고 말이다. 작고 가벼운 스마트폰과 어디를 가든 함께하는 우리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순간들에, 셀카에 빠진다. 이것을 비비안 마이어는 약 반백 년 전에 롤라이플렉스라는 카메라를 들고 시도한다. 50여 년 전의 비비안의 모습과 지금 나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비비안의 자화상 속엔 숨길 수 없는 표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거리에서 누군가 기다란 전신 거울을 옮기고 있다. 비비안은 그 모습을 보고 다가간다. 그리고 그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순간 셔터를 누른다. 그 사진 속에서 비비안은 ‘바로 이거지!’라는 만족스러우면서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 눈빛이 즐겁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다른 사진에서 보이는 무표정과 전혀 다른 모습이 그 사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더욱 궁금해졌다. 비비안에겐 분명 영화 속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퉁명하고 위압적인 모습과 동시에 다른 어떤 면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진 속에 숨길 수 없는 비비안이 또 다른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하지만 비비안의 또 다른 모습은 큰 구멍으로 남았다. 비비안 마이어란 인물에게 다가가기 위한 조각이 너무 적었다. 동시에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여전히 내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인물 사진들엔 사람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하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사진은 한순간의 겉모습을 담을 뿐이지만, 현실에서는 지나칠 수밖에 없는 짧은 찰나를 포착하여 그 뒤에 숨어있는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기도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비비안의 인물 사진에는 인물을 바라보고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고 한걸음 더 다가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삶의 피로하고 지난한 시간들, 아이러니한 슬픔, 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이고 모순된 감정들 역시 한 컷에 담긴다. 그런 순간은 쉽게 마주하거나 잡아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비비안 마이어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

한 인생의 심연 위로 몸을 기울이는 것은, 역광 속에서, 굴곡들 속에서, 가능성들 속에서, 말줄임표 속에서 한 운명을 해독하려 하는 것은 현기증 나는 시도다.

글쓰기라는 배를 타고 기슭을 떠날 때, 나는 백지 가장자리에서 온갖 암초들이 두려웠다. 창작의 전능성 속에 자리 잡은 한 사람의 ‘소설화된’ 전기라는 암초. 거기서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을 보려는 욕망이 키워낸, 환상이 부여된 인생이라는 암초. 파편, 구획된 토지, ‘선택된 조각들’, 자의적일 수밖에 없는 어떤 선택으로 축소된 존재의 분열이라는 암초. 자기만족, 흰 대리석과 불멸의 장미로 이루어진 영묘라는 암초. 내가 나의 분신을,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미지를, 내 시야와 내 이야기로 만들 반영을 온 힘을 다해 찾으려 할 거울이라는 암초.

가엘 조스, <역광의 여인, 비비안 마이어>, 170, 171p

작가는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인간의 삶에서 무언가를 선택하여 글과 이야기로 풀어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는 것을. 온전히 나에게 속하지 않은 이야기이면서도 나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을. 솔직히 말해 그 책의 문체와 저변에 흐르는 정조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읽고 나자 더 큰 기갈에 시달렸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나를 채워주지 못했던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란 사람의 생의 이면에 더 다가가고 싶었다. 내가 바라보는 삶의 방향이, 아직 모르지만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엇보다 그 이야기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지점은, 그 이야기가 하강, 소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일 테다. 이야기의 시작에 이런 인용구가 붙어 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소멸이 내가 반짝이는 방식이다.”

— 필리프 자코테, <종말이 우리를 환히 밝히기를>

 

이건 분명 가엘 조스가 초점을 맞춘 삶의 한 단면이다. 아마도 저자는 소멸함으로써 반짝이는, 그렇게 완성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가 비비안 마이어의 삶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바로 그 순간에 강하게 이끌린 것이 바로 그 지점이었을 테고, 그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비비안 마이어란 렌즈를 통과해 나온 가엘 조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야기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는 나는 다르게 쓰고 싶기 때문이다. 삶의 다른 조각들에 렌즈를 갖다 대고 다르게 프레이밍 하고 싶은 것이다. 그건 싫든 좋든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

지난 내 생일에 성수동에서 열린 비비안 마이어 전시에 다녀왔다. 책을 통해 본 사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전시 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사진들을 다른 누군가와 본다는 것은 새로운 의미였다. 함께 간 이는 나와 같은 사진을 보고도 다른 면을 읽어 냈다. 시선이 오래 머문 사진도 서로 달랐다. 사진을 보는 이가 사진의 프레임 밖, 혹은 그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각자 나름대로 지어낼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숨겨 놓은 사진에 더 오래 머무르는 이가 있다. 인물의 스쳐 지나가는 표정을 포착하여 깊이 있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사진에 시선을 빼앗기는 이도 있다.


비비안 마이어 전기

영원히 지속되는 건 없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줘야 해요.
일종의 바퀴예요.
일단 바퀴에 올라탄 뒤에는 끝까지 가야 해요.
그 뒤에는, 다른 사람도 같은 기회를 얻어야죠.
— 비비안이 이웃에게 죽음에 관해 한 말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

다시 다큐멘터리로 돌아오면, 남은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자신의 기억을 끄집어내 봤자 비비안 마이어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알 수 없게 되는 미궁에 빠진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어떤 회한과 미안함, 그리고 가닿을 수 없는 한 인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죽은 자 앞에서 산 자들은 이토록 무기력하다. 어떤 이야기는 서로 모순되고 그 모순이 바로 이야기의 핵심이다.


처음 영화를 보고 나도 매우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이 이토록 모순적이고 모호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언가 빠진 게 있다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고, 누군가는 잘못된 기억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전기를 읽고 나서 영화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기억의 왜곡은 있을 수 있지만 서로 상반된 이야기조차 모두 그들이 접한 진실이라는 것을.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다채롭고 변화무쌍하며 서로 다른 모습이라 할지라도 한 인간이 동시에 품을 수 있는 특징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 각자 자신의 삶을 떠올려 보아도 그럴 것이다. 나만 해도 지금의 나와 10년 전의 나를 생각해 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오늘은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는가 하면 내일은 또 생각이 바꿔 또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가족의 포함해 생의 한순간 나를 만나고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묻는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 실제로 그 시기에 그 사람들에게 나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다가갔을 것이며, 그들이 본 나 역시 나의 일부분이었을 수 있다. 관계란 것은 상호적이다.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의 말속에 숨어 있는 일관된 모습의 한 인물을 찾아내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은 결국 각자의 기억 속에 있는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함과 동시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힘든 시절을 겪기도 했지만 동물을 사랑하고 타인을 보살필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다고, 한 시절 친구였던 이를 오랜만에 만나 반가웠지만 그들에겐 더 우선시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고, 마지막까지 다정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 슬프다고, 그가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알았지만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다면 그 필름들을 내가 찾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보모로 평생을 살았지만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듯 그 자신이 원하던 삶을 살아간 것이라고. 그들의 말속에는 결국 자신이 있었다. 그들의 인터뷰에서 그들 눈에 비친 비비안 마이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비비안 마이어가 바라본 그들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세상에 나온 비비안 마이어

비비안 마이어의 삶, 그가 남긴 작품들, 그 작품들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이 놀랍고, 멋지고, 근사하다.


평범한 사람의 내면에 이렇게 다양한 빛깔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나를 매료시키고 경이감을 느끼게 한다. 이제 이야기는 새롭게 이어지고 있다. 비비안 마이어가 남긴 작품과 삶의 흔적들이 스스로 말했든 다음에 오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 용기를 주고 있다. 나 역시 그에게 자리를 양보받아, 오늘 내 삶과 나의 작품을 이어간다 거기에 인생의 경이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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