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궁근종이라고?
8cm에 달하는 크기였다. 내 자궁은 그저 생리할 때만 열일하는 줄 알았는데 언제 그렇게 쥐도 새도 모르게 크기를 키우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땐 6cm 정도였는데, 1년간 추적 끝에 사이즈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바로 수술 날짜를 잡게 됐다. 그리고 지금은 수술 후 겨우 기운을 차리고 입원실에서 회복 중이지만, 여전히 마취 가스가 장기에 가득 차서 걸음걸이는 엉거주춤 그 자체다.
입원도, 수술도, 전신마취도 태어나서 실로 처음 해보는 것들 투성이었다. ‘복강경 수술은 큰 수술이 아니다’라고 도대체 누가 이야기를 한 것이란 말인가...! 오후 1시 반쯤 수술실로 향했는데, 수술을 끝내고 마취기운이 남아 있는 채로 다시 입원실로 돌아왔을 땐 오후 6시가 넘은 무렵이었다. 도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근종이 혈관 가까이에 붙어 있어 출혈이 심해 2팩이나 수혈을 했다고 한다. 엄마에 의하면 정말 주먹만 한 사이즈의 혹이었다고 한다. 사실 수술은 별 것 아니었다. 지옥은 입원실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됐다. 마취 기운에 너무너무 졸린데 몸에 들어간 가스를 빼야 한다고 4시간 동안 심호흡을 계속하라고 했다. 소변줄을 꽂아 몸은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거라곤 내 얼굴을 꼬집고 몸을 비틀며, 목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들숨날숨을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옆에선 엄마가 차가운 손발을 계속 주물러 주며 ‘자면 안 돼!’를 수시로 외쳤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있는 그 와중에, 나는 배꼽 하나 째는 것도 이렇게 아픈데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배를 세 번이나 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엄마… 제왕절개 할 때 전신 마취한댔지? 후 진짜 엄마는 이걸 어떻게 세 번이나 한 거야?
엄마: 세 번이라니, 엄만 유산한 것까지 하면 다섯 번이지.
그렇게 아팠는데 다 잊어버리게 되더라.
다섯 번이라고? 나는 이렇게 한 번도 죽겠는데? 하지만 나는 할 말이 없다. 엄마가 다섯 번이나 배를 가르게 한 원인은 바로 첫 타자인 나이기 때문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말을 안 들었던 첫딸
호돌이와 동년배인 나는, 그러니까 호돌이보다 한 반년 정도 먼저 세상에 빛을 봤다. 한참 추운 겨울의 꼭두새벽, 자다가 다리 사이로 뭔가 흐르는 것을 느낀 엄마는 다급히 옆에서 자던 외할머니와 아빠를 깨워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긴급하게 의료진이 호출됐고 바로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갔고 새벽 3시 무렵, 첫딸인 내가 태어났다. 엄마 나이 27이었다. 제왕절개가 흔치 않던 당시에 엄마가 배를 가르게 된 연유는 내가 뱃속에서 거꾸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그때부터 엄마 말을 더럽게 듣지 않을 자식이 태어날 것에 대한 예고편이 아니었을까. 아무튼 내가 그렇게 첫 문을 연 탓에 엄마는 세 번이나 배를 갈라야 했다. 둘째 동생이 태어났을 때만 해도 너무 어려 기억나는 게 없지만, 막내 출산 후 힘들어하던 엄마의 모습은 생생하다. 당시만 해도 진통제를 맞으면 몸에 안 좋을 거라 생각한 엄마는 마취 후 고통을 생몸으로 견뎌냈다. 그래서일까, 나는 출산이라고 하면 기쁨보다는 고통이 먼저 떠오른다.
엄마가 병원에 가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시트콤이었다. 그 전날 병원에서 자궁문이 열렸으니 수술받을 준비를 하고 오라고 했는데 덜컥 겁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의사의 말을 불신했다. 요즘이야 초음파다, 정기검진이다 해서 주기적으로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를 받지만 그때는 임신 진단받을 때, 출산할 때 빼고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산모의 직감과 몸의 신호를 우선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첫 출산인데 의사가 수술 이야기를 꺼내니 걱정이 된 엄마는 다른 산부인과를 찾았다. 그곳에서도 똑같이 수술 준비 명령을 받았지만 엄마는 그냥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외할머니와 아빠를 호출했다. 다행히 미리 서울 외삼촌네 와계시던 외할머니는 급히 수원에 있는 막내딸 집에 도착했다. 문제는 아빠였다. 토요일을 맞아 사무실 직원 집들이에 간 아빠에게 연락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집들이하는 직원이 누군지 알아내고, 그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겨우 아빠와 통화연결이 됐다. 술이 잔뜩 취한 상태에서 아내의 긴급 호출을 받고 집에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이게 웬걸? 아내는 너무 멀쩡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빠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멀쩡한데 무슨 수술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때고 지금이고 의사 선생님의 말은 대부분 맞다. 그렇게 다음날 새벽 엄마는 양수가 터졌다.
맏며느리의 책임과 슬픔 사이
비록 제왕절개로 한 첫 출산이었지만 드디어 '엄마'가 됐다는 행복은 감출 수가 없었단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 후 어렵게 얻은 아이를 한차례 유산했기 때문이었다. 결혼 후 7개월 후인가에 아이가 들어섰다. 결혼을 하면 바로 애를 낳아야 하는 여자의 의무, 큰며느리의 책임감,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이룬 기쁨도 잠시, 3개월 후 눈물을 머금고 아이와 작별을 해야 했다. 그것도 아이러니하게도 큰며느리의 소명을 다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었다. 임신 후 가장 몸을 조심해야 하는 그 시기에, 시고모 딸의 결혼식에서 쪼그려 앉아 음식을 하고 어른들께 대접한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닌 탓이다. 80년대 후반만 해도 결혼식장에서는 식만 올리고, 피로연은 집에서 하던 때였다. 누구누구의 결혼식이 있다 하면, 전날부터 집안 여자들이 하나로 헤쳐 모여 잔치 음식을 만들고, 결혼식 당일에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가 혼주 집에 손님들을 초대해 그 음식으로 대접하던 식이었다. 그 집안 여자 중 하나로써, 한복을 입고 1박 2일은 무리를 한 것이 원인이 됐다. 다음날 갑자기 속옷에 묻은 피를 보고 놀란 엄마는 문간방에 살던 옆집 아줌마네 문을 급히 두드렸다. 그렇게 함께 찾아간 병원에서 유산이라는 말을 들었고 그 순간부터 그렇게 울음이 나왔더란다.
아빠: 자기, 내가 뭘 해줄까?
엄마: 내가 몸이 차갑데. 나 한약 한재만 해줘요.
그 한약의 덕인지 그렇게 내가 잉태(?)되었고, 우리 부모님의 첫 아이가 되었다.
낳을 때보다 낳아 놓고 더 미안하다는 엄마
한 번은 엄마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엄마의 젊은 시절 꿈은 뭐였냐고. 가수? 선생님? 은행원? 이렇게 똑 떨어지는 ‘명사’의 답을 기대하며 두구두구를 외치던 나는 의외의 대답에 뒤통수를 씨게 맞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너희 셋을 더 잘 키웠으면 싶어’
‘더 좋은 엄마’는 내 예상 대답에 없었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한 여자, 한 사람으로서의 꿈보다 누군가의 엄마로만 너무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꿈조차 꿔보지 못한 것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녀는 정말 세 아이의 엄마라는 삶 자체가 행복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니, 안타까움이라는 건 그저 지나치게 내 기준으로 내린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에서 자신의 출산 이야기를 들려주던 엄마의 기억은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태몽’으로 이어졌다. 내 태몽은 복숭아였다. 그때 당시 살던 집에 현관에 들어섰는데 신발 벗는 곳 앞에 큰 복숭아나무 한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무슨 용기에선지 높은 곳을 그렇게 무서워하는 사람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갔다. 그때 갑자기 등장한 할머니가 ‘할머니(나에겐 증조할머니) 드리게 3개만 따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세 복숭아가 세 딸이었다는 걸 의미한 것 같다고 믿는다. 세 번째 복숭아는 엄마의 굳은 의지로 다른 성별로 태어났지만 말이다.
"그렇게 높은 곳에서 복숭아를 딴 걸 보면 너희 셋은 적어도 아래서 노는 사람은 아닐 거야"
엄마의 바람이 과연 현실일지 소망일지 아직 알 길은 없으나, 확실한 건 엄마 역시 고슴도치라는 것이다. 수술을 받고 온 몸이 퉁퉁 부어 얼굴이 달덩이가 된 서른 중반의 딸을 보고 ‘엄마 눈엔 귀엽다’고 말하는 걸 보면, 자기 자식만큼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고슴도치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