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군대라떼(1)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 그리고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아무리 말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밤을 새워도 모자를 만큼 썰을 풀 수 있는 주제다.
그동안 내가 ‘아빠, 옛날 얘기 좀 해줘’라고 붙들 때마다 ‘술 한 잔도 없이 무슨 얘길 하냐!’며 시종일관 비협조적으로 나왔던 아빠 역시, 군대 썰 앞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적극적인 인터뷰이가 되었다.
솔직히 아빠의 입을 열게 할 미끼처럼 던진 주제였지만, 듣다 보니 빠져든다. 그냥 단순한 군대 얘기가 아니라, 역사와 인생의 진리가 숨어있는, 그런 이야기다.
주민등록증에 잉크가 조금 마를 무렵이었을까.
1978년 봄, 아빠는 군 입대를 위해 신검을 받으라는 안내를 받았다. 당시 신분은 고시생. 이듬해 4월은 검정고시 시험을, 5월에는 공무원 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험공부 명목으로 신검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빠의 신검 결과는 ‘갑 2종’, 그것은 바로 방위병으로 가는 등급이었다.
베이비붐 세대인 아빠가 군대를 갈 때쯤만 해도 병력이 남아돌던 시절이었다. 50년 말에서 60년 초에는 한 해에 100만 명 정도씩 아이가 태어났기에, 20대 청년 절반 정도만 군대를 갔다. 신체검사에서 ‘갑 1종’ 등급을 받은 청년들 말이다. (아빠 말 그대로) ‘X구멍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에 저기 작은 촌구석에서 5남 2녀의 첫째로 태어난 첫아들은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겨우 졸업한 아빠는 ‘돈’을 벌러 그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했다. 검정고시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중졸’에 불과했던 아빠는 신체 건장한 청년이었음에도 ‘갑 2종’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군대는 가야지’라는 생각이 더욱 뿌리 깊었던 때라, 자신이 ‘갑 2종’ 등급을 받았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면서도 속상하고 그랬단다. ‘찬성’과 ‘반대’로 갈리는 것 집안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증조할머니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잘했다, 잘했다’며 큰 손주를 얼싸안았다. 집안 종손이 군대를 가지 않길 바라는 대표적인 어른이었다. 둘째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 온갖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전쟁 끝나고 먹고 살기 급급하던 시절 두 아들을 유일한 버팀목으로 삼았던 때에 큰 아들이었던 할아버지가 입대하자마자, 둘째 아들(나의 종조할아버지)마저 입영통지를 받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집안 남자가 하나도 없으면 큰일 난다는 생각에, 증조할머니는 종조할아버지를 군대에 안 보내려 소를 팔았다. 생계가 달린 문제였기에 그 시절엔 어쩔 수 없는 병역기피였던 것이다. 둘째 아들을 집에 남겨놓기 위해 전 재산을 모조리 팔았으니, 큰 손주가 방위 간다는 소식이 기쁠 수밖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선 기쁜 마음으로 손주에게 맛난 음식에 술 한잔 먹여 다시 서울로 올려 보냈다.
반면 할아버지는 노발대발이셨다. 논에서 한창 쟁기질을 마치고 저녁께 집에 오니, 방위 등급 받고 온 아들놈이 왔다 갔다는 소릴 들었다.
“어디 군대도 못 가는 XX가 술을 X 먹고 가냐!!!!”
할아버지의 바람이 이루어진 걸까, 아빠는 결국 군대에 갔다.
1979년은 아빠에게 여러모로 인생에 큰 획을 그은 한 해였다. ‘중졸’의 한을 벗을 검정고시 시험이 4월에, 본격적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공무원 시험이 5월에 있었다. 우선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졸’이 되자마자 대한민국은 ASAP으로 아빠를 군대로 불러 들었다. 그해 5월 ‘갑 1종’으로 등급이 상향되어 현역 입영 대상자가 된 아빠는 ‘1979년 7월 9일’ 자로 입영 영장을 받는다. 하지만 당장 군대에 갈 수는 없었다. 공무원 시험 결과를 비롯해 아무것도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에 갔다간 제대 후 인생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시험)’을 이유로 입대를 연기했다.
다행히도 남은 공무원 고시에도 합격한 아빠는 79년 9월 5일 자로 공무원 임용이 되어 동사무소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제 입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1980년 4월 28일. 드디어 입대 날짜가 정해지게 됐다.
40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군부 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에 입대를 하는 젊은 아빠의 모습이 걱정스러웠다. 정말 김광석이 부른 ‘이등병의 편지’처럼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섰던걸까...?
입영 영장을 받은 청년들의 집합지는 광주 무등경기장(지금의 광주 공설운동장). 입대 날짜에 맞춰 고향을 내려가니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K-情이 아빠를 맞이해주었다. 그땐 군대 간다고 하면 마을 어르신들이 집으로 불러다 닭을 잡아 먹였다고 한다. 그렇게 튼실한 시골 장닭 몇 마리를 얻어먹고, 27일 저녁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광주로 향했다.
아빠의 작은 외숙이 광주역 근처에서 중국집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부모님과 함께 외숙 집으로 가서 하루 저녁을 자고, 드디어 입대 당일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변소에 가서 큰일을 보고 집 주변을 서성거리며 바람을 쐬고 있었다. 막막함이었을까, 두려움이었을까.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갈 생각을 하니 괜스레 마음이 좋지 않았단다. 서로 눈물바람 하는 게 생각만으로도 싫었다고 한다. 집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가, 아빠는 그 누구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에라 모르겠다’하고 홀로 무등경기장으로 달려가버렸다…!
집합지에 도착해 본인 확인을 하고 접수(?)를 하고 교통비를 받아 들었다. 논산까지 가는 기차표를 사라고 나눠준 돈이였지만, 아침도 안먹고 도망(?)나온길이라 출출함을 달랠겸 근처 구멍가게에서 빵 하나를 사먹었다. 넓디넓은 운동장에 입장하니 전라남도 각 지역에서 온 사내들이 줄을 맞춰 서 있었고, 아빠도 ‘장성 장정’을 찾아 줄을 섰다. 잠시 후 장성 장정 여럿이 깃발을 든 기관병을 따라 광주역에 도착해 플랫폼에 대기하고 있던 논산행 완행열차 11호 칸에 몸을 실었다.
같은 시각, 외숙 집에 있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아빠의 외갓집 식구들은 아침 댓바람부터 한바탕 난리를 치러야 했다. 핸드폰은 무슨, 집집마다 유선 전화 한 대도 귀하던 시절이니 갑자기 없어진 아들놈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이 새끼가 머리도 안 깎더니 군대 가기 싫어서 도망갔구나!!!’
매사에 미리미리 준비가 몸에 베인 아빠가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입대 전 미리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는 것이 기본 코스이거늘, 아빠는 입대 전날까지 장발을 휘날렸다. 아빠가 도망갔다고 생각한 식구들은 동네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무등경기장에서 머리 깎은 청년들이 떼 지어 광주역에 모이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광주역으로 갔다.
광주역은 그야말로 난장판 자체였다.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아들을 열차에 태우고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어머니들, 애인과 작별 인사를 하며 손수건을 놓지 못하는 아가씨들, 기차 창문을 움켜쥐며 눈물을 삼키는 사내들로 인산인해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좌석에 앉아 힐끗힐끗 창밖을 내다보던 아빠도 결국, 인파 속에서 ‘도망간 형’을 애타게 찾던 외종사촌 동생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성(형)!! 아따 진짜 월매나 찾았는지 아쑈!!!
간다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고 가지 그랬어라!!"
기차에 타고 있던 아빠를 발견한 식구들이 11호차 근처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양쪽을 들어 올리면 열리던 창문을 젖히자 큰 소쿠리 하나가 기차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논산 가는 길에 먹으라고 닭튀김이며 전이며 사이다며 바리바리 싸서 준비한 음식이었다. 보자기에 싸인 소쿠리를 받아 들고 멋쩍게 “아버지, 엄니 다녀올께라.” 인사를 전했다.
기름 냄새가 진동하던 소쿠리에 음식을 아빠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들 군대 보내는 부모님 마음이야 십분 이해하지만, 음식 먹을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같은 칸에 타고 있던 장성 장정들만 호강한 셈이다.
열차가 논산에 도착하자 1500여 명의 청년들이 우르르 내려 논산훈련소에 들어갔다. 열차에서만 해도 좋게 좋게 말하던 기관병들이 훈련소 정문에 들어가자 180도 태도가 바뀌었다. 32개월 군 생활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