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시즌2의 서막
사회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이 있다. 바로 ‘권태로움’인데, 세상에는 이를 이겨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존재한다. 나 또한 5년 차 대학원생으로, 별의별 방법들을 시도하는 스트레스 타파 도사다. 여느 때와 같이 쇠질을 하기도 하고, 소문난 국밥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누가 들을까 창피하지만 내 무대인 것 마냥 활개 하며 ’ 드뷔시의 달빛‘ 을 연주하기도 한다. 하루를 버티던 나에게 그날의 사건은 인생에서 중대한 결정을 하게 했다. 벚꽃이 지고 녹음이 물들 때쯤 난 ’R&D 연구비 삭감‘이라는 돌을 맞은 개구리가 되었다. 이 분야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하고, 그 발언이 열정적인 대학원생의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들의 짱돌에 맞은 것이다. 연구비 감축은 이내 월급 삭감으로 이어지면서 그동안 축적해 온 스트레스 관리법 사전은 무용지물이 되었고 새로운 트러블 슈팅을 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심 끝에 생각해 낸 것은 ‘결혼준비’이다. 적은 월급에 허덕이는데 결혼이라고? 맞다. 비혼을 외치고, 딩크를 주장하는 젊은이들답지 않은 결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혼은 나에게 ‘수단’이 될 수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박사 졸업’이라는 큰 관문을 건너는데 효자 노릇을 할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정을 이해해 주신 양가 부모님 덕분에 나는 시댁에 인사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식 날짜를 잡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시점으로부터 우리는 일주일 만에 웨딩홀을 비롯한 스드메, 웨딩밴드 예약까지 진행하였다. 어쩌면 우리는 꽤 오래전부터 결혼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작성하는 지금은 시댁에도 첫인사를 드리고 온 시점이다. 다행히 긍정적으로 봐주시고 혹여나 불편하지는 않을까 세심하게 챙겨주신 덕분에 잘 마무리하고 다시 일상에 집중하며 열심히 살아갈 동기를 되찾았다. 극한의 분노를 발단으로 결정한 결혼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해결법으로 얻은 행복감은 안정감으로 이어졌다.
여태껏 외부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방법들은 스스로 이겨내는 것들이었다. 내 상태를 혼자서 돌보며 어르고 달래는 데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면서 함께 나아가야 했다. 혼자가 익숙했던 터라 걱정이 앞섰지만, 의외로 ‘함께’ 무언가를 결정하고 이겨내는 과정은 큰 경험이자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특이하게 시작된 결혼 준비라 정답이 아닐 수도 있겠다. 방문턱 넘어가듯 자연스러웠던 우리의 첫걸음이 어떠한 발자취를 남길 것인지 걱정이 되지만 한편으론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