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버리기 연습'의 주요 전달은 '습관'과 '관찰'이다. 특히 마지막장 대담 (스님이 뇌과학자에게 듣는 뇌와 마음의 신비로운 관계) 편을 읽어보면 13여 년 전의 뇌과학 수준이 저만큼 신비롭게 발전해 있었구나 하고 감탄에 젖는 동시에 현재의 과학적 진보는 상당할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책은 본론 제2장 '몸과 마음을 조종하는 법'의 "말하기, 듣기, 보기, 쓰기와 읽기, 먹기, 버리기, 접촉하기, 기르기" 등의 육감각을 총망라하여 종교적인 명상과 과학적인 분석으로 차분하게 조목조목 설명한다. 그리고 '항복하는 사람이 열쇠를 쥔다'의 결말주제는 '자신의 약한 면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기를 조종하고 있는 흑막 뒤의 세계를 잘 분석하고, 거짓 없이 모두 털어놓을 수 있게 되면 그 효과는 상당히 크며 자신의 마음을 잘 관찰하면 번뇌를 쉽게 조절할 수 있다'라고 결말을 맺는다. 이 결말은 '대담' 편에서 좀 더 과학적 근거로 접근하는데 자아붕괴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 앗, 대본에 휘둘리다니 정말 바보 같았어!'
즉, 주인이 뇌이며 자신이 각본과 대본의 노예라는 두 개체적 이분법으로 자아의 분열을 구분하고 동시에 그 대본의 선택은 또다시 자아로 회귀하면서 자신을 조종하는 뇌의 혁명을 일컬어 깨달음으로 마무리하는데 잘 읽어봐야 된다. 과학이 궤변으로 오역되는 불운을 피해 가기 위해선 잘 읽어야 된다. 여기서 습관이 개입된다. 더 이상 반박과 확대의 영역으로 나아가지 말고 그 본질에 충실하라는 자기 확신이 자리 잡아야 되는데 여기서 애석하게 논리적인 반박으로 자아분열의 선을 넘는다. 익숙한 습관이 뇌에서 반응한 결과이다. 그러나 분열 또한 자연스러운 정신적 면역체계이며 논리적인 근거와 신중으로 무장되어 설득과 이해로 탄탄히 다져진 기반이 오히려 자기 오해의 가면을 쉽게 벗을 수가 없는 자아붕괴 前 자아이다. 가령 뇌의 조종을 당하는 자아는 뇌의 자아성을 부정하고 외부의 과학적 시그널의 경계하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설득력을 정한다. 13년 전의 뇌과학 수준이 저러한데 오늘날 현재 상당히 전분적 분야의 진보는 비전문가적 상상으로 '그럴 것이다'라고 추정할 뿐이지만 과학은 퇴보되지 않으니 과거의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비약적으로 발전된 분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뇌의 조종에 따른 행동'의 경우의 수 가설이 성립된다.
첫째, 조종을 반대로 해석하고 반대된 해석으로 행동한다.
둘째, 조종을 정확히 해석하고 행동만 반대로 행동한다.
셋째, 조종을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규명하여 명명백백 증명한다.
넷째, 조종을 인정하지 않고 이전의 습관화된 자아로 행동한다.
다섯째, 조종을 인정하다 못해 순종하고 순종된 행동만 한다.
여섯째, 조종을 인정하지만 협력과 절충으로 자아의 행동을 승화시킨다.
첫째와 둘째는 조종의 인정여부가 암묵적이며 기교적이고 상당히 두뇌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승리해야 본자아로의 회귀가 가능하다. 반면 셋째와 넷째는 투쟁적이고 항거적이다. 위에서 다룬 항복(인정)과는 정반대이다. 다섯째와 여섯째는 어쨌든 인정하지만 결과는 서로가 상반된다. 문제는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은 다섯째를 인정하지 못해서 첫째, 둘째, 셋째 그리고 넷째의 반응으로 열쇠를 놓쳐버리는 가설이다. 여기서 인위적 망상이나 연기가 개입된다면 자아의 분열은 더더욱 가속된다. 여기서 함정은 바로 뇌의 조종이 아닌 조정의 역할은 그 본질에 행동된 자아의 투영성인데 그 파급효과가 그 자아만으로 국한된 게 아니고, 긍정적 그리고 부정적 결과에 따라 가족과 동료 그리고 여러 지인들까지 죄책감으로 비화할 수가 있다. 목적이 아닌 단순히 '인격개조프로그램'의 수단으로 이용했더라도 (실제 의심의 자아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에) '의심적 자아'는 과정 내내 힘들어한다. 왜냐하면 큰 신뢰를 명분으로 작은 신뢰가 무너졌고 그리고 본인의 동의는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주변인들이 알아줘야 한다. 그것이 이과정의 핵심이다.
'모두 무의식의 흐름에 조종당한 결과임을 깨달으면, 그런 감정들이 문득 사라집니다'
이 마지막 문구는 결국 여섯째를 완수하는 그 험난한 여정을 겪어야만 맛볼 수 있는 과학적 명제이다. 자아의 주체와 주인은 자신의 뇌이다. 타자가 뇌에 개입되면 주인은 노예가 되지만 개입이 되었든 말든 영구 지속된 다섯째의 지루함이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처럼 기교의 분노로 표출되고 그리고 분류하고 습관화된 관찰은 자포자기하는 넷째로 흐른다. 가장 자신을 잘 아는 자아는 자신의 뇌이다. 다섯째처럼 뇌의 조종에 맹목적으로 순종하지 말고 때론 기교와 투쟁심의 뉘앙스의 관찰로 익숙한 습관의 결별만이 여섯째 통찰력을 습득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감정은 아니더라도 '스피노자의 48가지 감정'을 일일이 분류하고 연습하고 관찰하다 보면 자연히 깨달음을 자각하고 그리고 통찰력으로 삶의 빛을 발휘할 것이다. 자! 이제 두 번째 늦가을여행을 준비하며 남해로 출발하는 설렘만 당분간 생각하련다!
-2023년 10월 20일 모처럼 집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