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타이머드 Sep 14. 2018

Evernote 삭제 후

메모는 왜?

 메모 좋아하십니까? 저는 무척 좋아하는 편인데요. 제가 살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어플리케이션을 딱 하나 뽑자면 압도적으로 Evernote입니다. 메모 덕후로서 9년 간 사용했지만 지금은 그동안 모은 메모를 정리하고 지웠습니다. 왜 제가 그렇게 결심하고 그 후에 어떻게 메모 체계를 바꿨는 지 여러분과 함께 나누려 합니다.


왜 Evernote

 Evernote는 자료를 정리하는 일이 좋아서 시작했습니다. 차곡차곡 늘어가는 메모를 보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약간의 성취감도 느껴졌고 꾸준히 할수록 제대로 메모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모를 하고 나면 청소 후 느껴지는 상쾌함이 있었어요. 그렇게 7,000여개 이상을 모았습니다.


메모 중독 끊기, 결심

어느 날, 메모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먼저, 메모를 해도 좋은 점이 딱히 없었습니다. 메모가 기억력을 높여 주지도 않았습니다. 저희 경우 메모를 시작하면서 오히려 기억력이 더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니, 메모에 기억이 의존하는 느낌에 가까웠습니다. 물론, 메모를 통해 무엇을 얻겠다는 의도는 없었지만 내 자신에게 의미가 크지 않은 일을 계속할 순 없었어요.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죠.

 두번째로 메모를 정리하는 시간이 메모의 수의 비례해서 증가했습니다. 메모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폴더를 세세히 나누기도 하고 다시 합치기도 하고 폴더 형태에서 태그 형태로 중간에 바꾸는 작업했습니다. 특히 메모의 소재가 고갈됐을 때 메모 대신 할 수 있는 대리만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정리가 주는 장점은 보기 좋고 찾기 쉬운 것 정도이지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쯤 되니까 Evernote가 나의 두번째 뇌가 아니라 제가 Evernote의 두번째 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9년이 지나고 삭제를 결심했습니다. "Evernote를 그만하면 어떻게 될까?"


막쓴다고 될 일이 아니더라

 제대로 활용도 못하는 메모더미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메모를 잘 활용할 수 있을 지 고민하게 됐어요. 제 메모 기록 패턴을 기반으로 Rule 2가지를 정했습니다.

첫째, 메모의 유효 기간 지키기.

 비유하자면 메모는 맛있는 음식과 같다고 생각해요. 무슨 이야기냐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지 않고 방지하면 썩어서 쓸모없게 되죠. 메모도 특정 기간 안에 결과물로 엮어 내지 못하면 쓸모없게 됩니다. 저의 경우 보통 메모를 쓰고 1주 정도 지나면 거의 잊어버립니다. 이 경우 유효 기간이 1주 정도인 것이죠. 이 후로는 기억도 없고 Evernote 에서도 용량만 잡아먹는 좀비 메모가 됩니다. Evernote 에서는 좋은 검색 환경을 제공하지만 이를 통해 접근하는 경우는 전체 메모의 5%도 안됐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검색을 통해서 결과물로 만드는 경우는 0.1%도 안됐습니다. 그 주제에 대해 계속 자료를 모을 것이 아니라면 빠르게 자료를 정리하고 결과물로 엮어야 합니다. 메모가 상해버리기 전에요.

둘째, 낙서같은 메모는 그만.

메모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경험 상 저는 좋은 아이디어와 글귀가 떠 올랐을 때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쉬워서 적는 경우가 가장 많았습니다. 메모를 하는 이유가 내용이 아니라 휘발성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유가 딱히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 카테고리를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이름도 크로키(아주 빠르게 휘갈기는 미술 기법)라고 적었습니다. 나중에 정리를 해보니 참 쓸모없는 메모가 많더라고요. 왜 메모를 하는 지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그저 낙서에 불과합니다. 낙서를 모아 책을 낼 사람이 아니라면 이 메모를 작성하는 건 시간 낭비가 될 겁니다.

 정리하면, 메모를 잘 활용하려면 비교적 단기간에 하나의 주제 아래로 메모를 모아 결과물을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결과물이 실패로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도했다면 그것을 위한 메모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은 나중을 위해 메모하지 말고 지금의 결과물을 위해 꼭 필요한 메모를 하시길 바랍니다.


정리하면서 느낀 것

 Evernote 정리를 시작할 때 정말 막막했습니다. 마치 평생 살 집인 줄 알고 가구와 집기를 가득 사놨는 데 이제 이사를 가야 하는 느낌이었죠. 하지만 정리의 핵심은 삭제 아니겠습니까? 정보 기반의 자료는 그냥 과감히 지울 수 있었는데 그 외의 메모는 하나씩 다 읽어보면서 삭제를 하기 시작했어요.

 역시 시간이 오래걸리더군요. 9년 전 메모를 보면서 그 때 그날의 감정에 잠기기도 했고 왜 그 땐 이 내용을 적었을 까 자문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글이라면 가차없이 삭제하며 줄여 나갔을 텐데 내 이야기니까 쉽게 지나칠 수 없더라고요.

 그러다 정리하길 잘했구나 싶은 순간이 있었습니다. 중복된 메모를 자주 발견했을 때입니다. 같은 내용을 1년 뒤에 또 메모로 적고 또 2년 뒤에 적고 있었어요. 메모의 중복이 시사하는 것은 명확했습니다 메모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것은 메모가 기억하고 싶은 내용을 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아니라는 결정적 증거였습니다. 언제든 메모가 중요한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잊기 위함 혹은 기억해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함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어요.

 더욱이 만약 그 메모가 자전적 문제 의식을 담고 있었다면 문제를 방치하고 그냥 지나갔다는 의미가 됩니다. 쌓아둔 문제를 언젠가는 해결할 거라는 다짐과 함께 말입니다. 그 때, 그 문제를 바로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메모가 아니라 올바른 해결책을 가지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니까요.


정리 후 새로운 메모 체계

 그렇게 정리 후 1년이 지났습니다. 삭제 후 최근까지 Evernote 대신 Keep을 사용했습니다. 꼭 필요한 내용만 적으려고 했고 모이면 의미가 있는 내용을 하나의 노트에 모아 담았어요. 메모를 작성하는 경우도 70% 정도 줄었습니다. Keep에는 별도의 Folder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리가 필요없는 구조였고요. Tag 기능이 대체 가능했지만 그렇게 나눠서 사용하기에는 너무 간단한 Tool이었어요. 그날의 소재는 가장 상단에 어떤 메모들이 있는지 보면 빠르게 떠올릴 수 있었고 메모가 지저분하게 퍼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크게 불편하진 않았습니다.


다음 방향

 아마도 Evernote로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9년 간 사용할 정도로 좋은 Tool이라는 점에는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성과 없이 메모를 했던 저에게는 너무나 전통적인 앱으로 자리 잡아 버렸어요. 사용하는 Tool을 만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철학이 있잖아요. 그 Tool을 사용하면 그 철학에 자연스럽게 녹아 듭니다. 그래서 Tool을 바꾸는 것도 좋은 접근 방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Keep로 바꾸면서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고 생각하고요.

 메모 Tool이 바뀌었다고 해서 메모 덕질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저에게 의미있는 메모 패턴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 중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배터리 불안에서 벗어나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