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 List와 한걸음 멀어지기
사실 우리는 각종 할 일 정리 기법을 쓰지 않고도 어떤 일이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가치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며 또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잘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걸까요?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이상적인 그림을 기대합니다. 중요한 일중에 급한 일과 가치 있는 일을 순조롭게 모두 수행하는 하루 말입니다. 급한 일도 가치 있는 일도 모두 중요한 일이므로 꼼꼼히 노트에 적어두려 합니다.
가치 있는 일은 Due가 없고 반복적으로 꾸준히 수행해야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작가는 매일 읽고 써야 하고 뮤지션은 매일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프로그래머는 매일 코딩을 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얼마나 더 해야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루 정도 하지 않아도 티가 나지 않을 것 같고 매일 고집스럽게 하는 모습도 왠지 부질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된다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항상 이 일을 방해하는 요인이 있습니다. 바로 '급한 일'입니다.
급한 일은 예상하지 못한 일로 바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입니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무시할 수 있습니다만 중요하면서 급한 일을 쉽게 무시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 이런 일은 발생하자마자 수행되는 경우가 많은 데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보이고 결과가 바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꼭 해야 할 급한 일을 놔두고 언제 끝날지도 모를 가치 있는 일을 먼저 하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죠. 그래서 급한 일은 가치 있는 일을 할 시간을 손쉽게 빼앗아 갑니다. 그런데 중요하고 급한 일을 하고 나면 참 남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잠들기 전에 '바쁜 것 같은데 한 게 없네'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면 이 경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할 시간 없을 때 우리가 선택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가치 있는 일을 '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공부를 위해 먼저 학원은 끊습니다. 그렇게 되면 외부의 압력에 의해 Due가 설정되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이 방법에 적응된 사람은 인터넷 강의라는 더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맞지 않는 방법이라며 무시합니다. 만약 단기간에 성과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라면 효과적인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가치 있는 일의 특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이런 방법은 수동적인 Due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에 Due가 사라지면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힘듭니다. Due가 끝나자마자 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죠. 결국 영어공부를 위해서 꾸준히 영어학원을 등록하지만 실력을 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우리는 의식적으로 급한 일을 밀어내고 가치 있는 일을 끌어당겨야 합니다. 전통적인 방법에서는 급한 일 보다 가치 있는 일을 먼저 하거나 특정 시간을 확보해서 수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먼저 하는 일이 나중에 하는 일보다 수행할 확률이 높습니다. 어렵고 싫거나 지겨운 일을 먼저 해야 한다며 Eat The Flog First라는 표어도 있죠. 이상적인 상황이라면 아침에 연속적인 시간을 확보하고 그 시간에 가치 있는 일을 수행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을 위해서 평소 패턴과 달리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만 하거나 본인의 취침시간을 스스로 제어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쉽게 수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해결을 위한 첫 단계는 가치 있는 일이 스케줄링 대상이 아니라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매일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노트에 적어야 할까요? 설정한 시간에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알림 설정을 해야 할까요? 매일 하는 일에는 이런 일이 불필요합니다. 매일 하니까 그 일은 자연스럽게 기억될 테니까요.
오히려 특정 시간에 그 일을 하겠다고 정하면 실제 지켜지지 않는 경우, 그 일 자체에 대한 회의를 느끼기 쉽습니다. 우리는 과하게 무언가 잘하려 할 때 그 일을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일을 매일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일을 못했다고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 없습니다.
두 번째로 뇌에 이미지로 할 일을 기억하는 겁니다. 제가 좋아하는 도미니크의 여행법은 암기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고 대상을 생동감 있게 기억할 수 있는 기법입니다. 단순 사실 나열보다 스토리를 가진 소설이나 영화가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머릿속에서 공간화가 이뤄지기 때문인데 이 여행법도 같은 맥락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 보기 위해 아래와 같이 가치 있는 일을 가정해서 중요도 순서대로 나열해보겠습니다.
1. 글쓰기
2. 프로그래밍
3. 영어 공부
4. 사업과 부동산
5. 아이 교육 공부
이제 할 일을 머릿속에 공간화할 장소를 정합니다. 저는 제 방을 이용하는 편인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Remind가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방을 머릿속에 그리고 할 일을 차례로 투영시킵니다. 제 방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오른쪽에 붙박이 옷장이 보입니다. 옆에는 5단 책장이 있고 가운데는 창이 있죠. 창 아래에는 빔프로젝터로 쏘기 좋은 적당한 크기의 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문의 왼편에는 책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아이의 옷장이 있죠. 드레스룸에 아이 옷을 가져다 놓기에는 아이에게 바로 가져다주기 불편해서 제 방에 가져다 놓았거든요.
이제 첫 번째 일을 투영시키기 위해 문 앞에서 붙박이 옷장 안에서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합니다. 작은 공간이지만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들어가 있는 모양입니다. 나무 의자가 불편해 보이지만 글 쓰는 표정은 진지합니다. 이제 옷장에서 나와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합니다.
5단 책장이 보입니다. 칸마다 서버와 노트북들이 많습니다. 관련 업무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자원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네요. 의자는 없고 일어서서 타이핑을 하고 있습니다. 앉아만 있다면 허리 디스크에 걸리기 쉬울 겁니다.
세 번째 섹션으로 갑니다. 창문에는 A부터 Z까지 알파벳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빔프로젝터에선 미드 프렌즈가 한창 상영 중인데요. 오늘도 섀도잉을 하면서 영어 발음을 따라 하고 있습니다. 영상이 2배속으로 재생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됩니다.
네 번째로 창업, 부동산 관련 책장을 넘기면서 책상 위에 앉아 공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다섯 번째로 아이 옷을 이 보이네요. 예쁜 아기 옷 더미 옆에서 자녀교육을 위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머릿속에 공간화하면 가치 있을 일을 외우기 쉽고 연상하기도 편합니다.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해서 외워야 하나 싶으시겠지만 점점 외우는 데 걸리는 데 시간이 줄어들고 편해집니다.
각 할일마다 파생된 세부 할 일이 있을 겁니다. 그런 파생 일거리는 각각의 환경이 발생하면 알게 되도록 설계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글을 Notion 플랫폼에 적고 있는데요. 앱을 켜면 무엇을 써야 하는지 어디까지 썼는지 쉽게 알 수 있도록 ">><<<"표시를 하고 간단한 쓰고 싶은 내용도 적어둡니다. 프로그래밍에서는 Source code 안에 "TODO:"를 적어 두거나 코딩할 때만 꺼내는 노트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죠. 핵심은 모든 프로젝트의 세부 할 일을 한곳에서 보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많은 할 일을 한곳에서 관리하는 것은 추가 관리 기법을 요하게 되고 집중에 방해됩니다. 글쓰기라는 일을 할 때는 글쓰기에 대한 파생 일들만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에 대한 파생 일거리와 함께 노출시켜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저는 이 방법을 통해 가치 있는 일을 메모하는 대신 기억하면 실천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위의 할일 조합은 3달 전 순서인데 지금은 중요도에 따라 순서가 조금 바뀌고 몇 개 일이 변경됐지만 틀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고백컨대 이 글쓰기가 여전히 첫 번째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에게 가장 가치 있을 일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3초 안에 말할 수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