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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아치우먼 Sep 27. 2022

일을 대하는 태도

첫 번째 - 일을 소명으로 대하는 태도



드디어 원하던 것을 갖게 됐어. 그러면 나는 행복할까? 

별로. 대체 뭐가 빠졌기에? 

내 영혼에는 더 이상 욕망이 주는 짜릿함이 없어.... 아, 착각해서는 안돼. 

기쁨은 만족에 있는 게 아니라 좇는 과정에 있는 거야.

-피에르 오귀스탱 카롱 드 보마르셰 (세비야의 이발사 중 피가로의 결혼 중의 일부)



코코 샤넬의 도전

샤넬 백은 없지만 샤넬의 탄생에 대해 <인간 본성의 법칙>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샤넬은 고아로 수녀원에서 자랐으며 고등학 때 재봉을 배웠다. 그녀는 연극을 좋아해 코코라는 연극 무대에서 섰으나 뛰어난 배우는 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샤넬은 돈 많은 남자(에티엔 발상)의 정부가 된다. 그녀는 우연히 입어본 발상의 옷이 너무나 편하고 자유로운 기분에 감동받는다. 발상의 셔츠를 입고 남성용 보터 해트(밀짚모자)를 착용하고 외출한 샤넬은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허리를 꽉 쬐는 코르셋을 입던 여성들은 샤넬이 입은 옷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이때 여성들은 승마복을 입지 못해 말을 탈 때 옆으로 앉아서 탔으나 샤넬은 자신이 직접 만든 승마복을 입은 채 남자처럼 멋지게 말을 탔다. 그녀는 자신의 페르소나(욕망)를 더 발전시켰다. 여성 수용복을 디자인했고 바다에서 그 수영복을 입고 멋지게 수영을 즐겼다. 

편하면서도 활동적인 샤넬의 옷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오늘날 유행하게 된 가디건도 남성용 스웨터 앞을 가르고 단추를 달아 편한 여성 옷으로 발전시킨 것이 샤넬이었다. 샤넬은 여성이 남성의 옷을 입는 금기를 깨뜨리며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향수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여 오늘날 코코 샤넬이라는 명품의 아이콘을 창조할 수 있었다.

(인간 본성의 법칙 중에서 요약)


여기서 샤넬에게 묻고 싶어 진다.

당신은 모든 것을 거머쥔 뒤가 행복했나요? 발상의 옷을 입은 채 거리를 활보했을 때 여성들이 보내는 찬사가 더 행복했나요? 샤넬이 끊임없이 금기를 깨고 새로운 발상을 시도했던 것은 그녀 스스로가 그것들이 주는 기쁨, 혹은 행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디자인의 세계에서 향수라는 새로운 분야로 눈을 돌린 것이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서인가? 샤넬은 <도전하는 과정에 있는 기쁨>의 맛을 알았기 때문에 2차 대전의 실패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다시 우뚝 일어선 것이다.


기쁨은 결과에 있는 게 아니라 과정에 있다.

원하던 대기업에 입사했고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 1년 정도는 적응의 단계, 새로운 수입이 생겼고 새로운 인간관계도 형성되었다. 그런데 직장인들의 대부분은 3-5년 사이에 적응에 대한 무기력을 겪는다. 직무에서는 선수가 되지만 여기 평생을 바쳐도 좋은지, 혹은 이대로 쭉 이일을 계속해도 되는지. 또는 알 수 없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친구나 친척을 만나면 자신보다 더 좋은 직업이 부럽기도 하다.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많이 봤다. 

매일 출근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굳은 표정, 태클 거는 민원이나 잘 피해 무사히 하루를 잘 넘기면 되는 사람, 의미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잡담하고 술로 허망함을 채우는 사람. 

직장에 안착하는 것이 삶의 종착지가 되어버린 사람들 말이다. 

더 이상 <아무런 과정>에 있지 않는 사람들. 

아무런 과정에 있지 않으면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불안은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들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들이 하찮게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어."



소명을 발견할 책임

솔직히 나는 진로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청소년  진로 찾기라는 말도 싫어한다. 주입식(물론 조금 나아지는 했지만) 교육과 온통 모든 것이 대학 진로 맞닿아 있는 우리 교육에서 청소년 진로 찾기는 엄밀하게 말하면 어느 대학에 무슨 과로 원서를 넣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특이한 검사 방식까지 만들어 수많은 청소년들의 진로방향을 설정했다고 자랑하는 저자가 있기도 하지만 유명 대학, 좋은 직장으로의 틀에 박힌 코스는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기의 짧은 경험, 한정된 경험으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하며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대학생이 자신의 진로를 뒤늦게 찾느라 방황하는지.

반면, 알파고 시대(4차 산업혁명)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평생직장은 없다, 다양한 방식의 일 트렌드가 존재한다, 직업의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그리고 사람의 수명은 점점 늘어난다. 그럴수록 우리가 풀어야 명제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의 고민은 더 절실히 와닿는다.

소명, 나의 삶의 목적을 실현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어떤 일을 찾을 것인가?


일을 소명으로 대하는 태도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만 나중에는 가장 후회 없는 삶을 꾸리는 방식이기도 하다. 삶의 목적과 일의 방향을 일치시킴으로써 <과정을 만들어 가는> 태도는 가장 이상적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현실에서 가장 어려운 방식이지만 유럽의 경우, 특히 철학을 모든 학문의 필수과목으로 삼고 있는 프랑스는 <어떤 일이 아니라> <어떤 삶>을 꾸릴 것인지를 고민하는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이런 소명을 소중히 여긴다. 그들은 일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삶을 즐기는 데> 목적을 둔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요리사와 종업원들의 휴식시간을 보장하기 위해 오후 2시~6시까지는 식당이 문을 닫는 문화가 자리 잡은 것도 전통적인 프랑스 삶의 방식에서 기인했다. 즉 요리사와 종업원들도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해서는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런 시간이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게 된 식당의 브레이크 타임은 여기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짐작해 본다.


프랑스는 모든 유럽 중에서 가장 노동시간이 짧다.(법정 노동시간은 주당 35시간-우리는 주당 52시간) 그들은 <휴식이 노동의 원천>이라고 믿으며 세컨드 하우스를 보유한 채 주말을 가족과 함께 즐긴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생산성은 제일 높다. 일의 의미를 일 하는 것에 두지 않고 자신의 삶을 즐기는 것에 방점을 두기에 가능한 결과다. 프랑스는 대부분 일의 소명을 <즐기는 자체>와 연결시키기 때문에 짧은 노동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디로 들어갈까?

보다,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까?를 먼저 물어야 한다.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이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 것인지 해답을 찾아가는 길이 곧 직업을 가지게 되는 과정이어야 한다. 의사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실력 좋은 흉부외과 의사가 되고 싶다. 교사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학생과 친구처럼 소통하는 교사가 되고 싶다. 직업상담사가 아니라 타인의 삶에 한 방울 참기름 같은 직업상담사가 되고 싶다. 연예인이 아니라 희망과 미래를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 


이런 고민을 다른 말로 하면 직업가치관이라고도 하겠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으니 삶의 가치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소명이나 직업가치관을 고민하지 않고 삶을 사는 사람도 많지만 타고난 내적 방황자들은 이런 과정이 없으면 반드시 넘어질 때가 온다. 이유 없는 허무나 무기력이 덮칠 때가 있다. 



사람마다 일을 대하는 태도, 즉 일을 대하는 가치관이 모두 다르다.

일을 대하는 태도가 내가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파악하는 것이 기본이다.

현재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심리적 갈등이나 고민이 많이 되는 사람,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일을 자주 그만두는 사람, 이 일 저 일을 기웃거려 보지만 딱히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소명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는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것, 생산적인 것과 비생산적인 것, 현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해 보이는 것, 우선과 비 우선의 차이를 가려 마인드 맵이나 브레인스토밍으로 정리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다. 


무조건 안정적인 직장에 올인하기보다 노마드 워커(nomad-workers)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삶의 목적과 맞는 소명을 발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물론 주변의 눈치나 시선에 초월할 배짱만 있다면 자신의 소명을 찾는데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일을 자신의 소명과 연결 짓는 부류는 자신이 갈 방향을 찾으면 열정적으로 몰입해 간다.


예술가, 연예인, 철학자, 작가, 크리에이터와 같은 직업들은 소명이라는 바다에 자신을 던지며 무명이라는 힘든 시간을 견딘다. 이 과정에서 성공하여 유명세를 떨친 사람도 있고 이름 없이 잊히는 사람도 있다.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면 그것으로 성공한 셈이다.

거창하게 소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이 가지는 일에 대한 어떤 믿음 같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하다.

하는 일을 통해 <나는 어떤 사람이 되겠다> 혹은 <000하는 사람이 되겠다>라는 정도의 각오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소명에 대한 제1성향

<인간 본성의 법칙>에서 제시하는 제1성향의 신호를 소개해 본다.

과학자 마리 퀴리는 네 살 때 아버지 서재에 들어갔다가 반짝이는 화학실 실험용 관과 계측 장치에 이끌렸던 기억을, 안톤 체호프는 극장에서 본 연극에, 스티브 잡스는 쇼윈도에 비친 전자제품의 디자인에 감탄했으며 타이거 우즈는 자신의 아버지가 골프를 치는 것에 마법처럼 이끌렸다.

우리 큰 딸은 광고천재 이제석이란 책을 보고 미술이라는 세계로 발을 디뎠다. 


영화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 장애인 역할을 소화한 배우 박정민은 중3 때 놀러 간 별장에서 배우 박원상을 만났다. 박원상이 출연한 와키키브라더스 영화를 보고는 자신의 진로를 배우로 바꾸게 된다. 박정민에게 제1성향의 신호는 바로 <와키키 브라더스>라는 영화와 박원상이라는 배우였을 것이다. 박정민은 뛰어난 외모도 큰 키도 아니었지만 연기력은 뛰어난 배우로 알려지게 되었다.

배우 박정민은 자신에게 온 제1성향의 신호를 꽉 껴안았기 때문에 배우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의 소명은 <대한민국에서 연기로 관객들을 감동시키는 배우가 되겠다>가 아니었을까.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끌려 이미 그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늦더라도 자신이 뭔가에 매혹되었던 기억, 제1 성향을 반추해 보는 것도 추천한다. 

자신에게 섬광처럼 짜릿하게 스쳐간 어떤 기억들을 한 번 떠올려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출석부로 친구의 머리만 때리지 않았다면 나는 국어국문학과로 갔을 것이고 맨 부커까지는 아니더라도 은희경 정도의 소설가는 되어 있지 않았을까. 터무없이 물리학과를 나와 또 그와 전혀 관계없는 직업상담사를 하고 있지는 않았을 건데. 

그러나 나의 직업적 소명을 위해 능력이 허당임에도 불구하고 잡(JOB) 수다를 위해 몰두하고 있지 않는가.


현실은 막막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일에 대한 소명>을 발견해야 할 책임을 다 가지고 있다. 그렇지 못하고 현실에 떠 밀려 사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건 내 책임도 부모 책임도 아니니 다만 슬퍼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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