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미혼모 c와의 조우
그녀를 c라고 부르는 건 백인 캐나디안이라서 편의상 그렇게 정했다. 실제 이름은 모른다. 한 번도 대화를 해본 적도 없고 나라는 존재조차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사실 '그녀'라고 부른 것조차 좀 과한 느낌이다. 어리다. 귀밑의 솜털이 우리 딸보다 더 많아 보인다. 그래서 '그 아이'라고 칭는게 맞는 연령대. 그녀라면 좀 연륜이 있는 여성이라는 느낌. 그 아이라면 법정 음주 연령이 안된 앳된 소녀 정도.
그 아이를 만난 건 출근길 횡단보도에서다. 내차가 정지선 첫 번째였고 앞창을 통해 서둘러 움직이는 사람들을 무심히 지켜보고 있던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한 아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유모차를 끌고 8차선 횡단보도를 힘차게 건너가고 있던 덩치 큰 한 아이. 2년 전에 비해 좀 엄마스러워졌지만 여전히 아이 티가 났다. 서둘러 건너는 그 아이에 눈 초점을 맞추어 뭐가 더 변했는지 체크했다. 유모차가 좀 커졌고 튼튼해진 걸로 봐서 애기는 정상적인 발육을 하고 있는 걸로 판단되고 그 아이의 복장은 큰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 또래의 나이에 걸맞은 옷을 입기에는 몸의 균형이 망가져있었다.
그 아이를 처음 본건 2년 전쯤 겨울. 그 전 동네에서였다. 매일 아침 6시 반이면 강아지 산책을 시켰다. 밴쿠버의 겨울 이 시간이면 칠흑 같은 어둠이 빛을 조롱하고 또 습하고 추운 냉기가 헐렁한 옷 속을 헤집고 들어와 인간의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시킬 때이다.
그 당시 우리 강아지 산책코스는 집 주변 200미터 정도. 가라지 도어를 통해 뒤로 나와 단지 내 어린이 놀이터를 지나 작은 숲길에 들어서면 가로등 불빛을 등 뒤로 받게 되는 구간에 선다. 그 길 중간쯤 어느 주택 일층 뒷방의 문이 열리면서 불빛이 새 나왔고 다들 자고 있을 그 시간에 누군가가 나왔다. 덩치는 성인이었는데 전체적인 윤곽은 소녀티가 팍팍 났다. 턱밑의 솜털도 아직 다 빠지지 않은 어려 보이는 아가씨였다. 의외로 그 아이의 손에 유모차가 달려있었다. 그 유모차 안에는 가냘픈 아기 울음소리가 간간히 나왔다. 울음의 주인공은 어른 손만 한 얼굴을 가진 조그만 애기. 눈만 빼고 모조리 옷과 담요에 쌓여있었다. 이 꼭두새벽에 깨우는 엄마가 원망스러운지 아니면 앞으로 펼쳐질 험난한 세상을 예견이라도 하는지 우선 울고 보는 것 같았다. 하긴 어른도 깨우면 신경질 낼 시간에 깨우는 엄마가 야속하기도 할 것이고 또 찬바람을 뚫고 어딘가로 가야하는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기 울음소리를 감안해서 출산한 지 일주일 이전인 것 같았다. 애기는 안정을, 엄마는 출산 후 회복기를 가져야 할 때인데 새벽부터 출타하는 게 궁금했다. 나도 모르게 가는 길을 멈추고 강아지를 돌려서 천천히 따라갔다. 단지를 지나 큰길을 쭉 올라간 뒤 그 횡단보도 앞에 멈췄다. 일단 그날은 그기까지만. 다음날 그다음 날도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복장으로 방을 나와 그 길을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어딘가에 애기를 맡기고 엄마는 학교를 가거나 일터로 가는 게 아닐까. 캐나다 사회보장제도만으로 싱글맘은 어느 정도 혼자 살 수 있을 터인데 왜 아침부터 설쳤을까. 경력이 단절되는 게 무서웠을까. 아님 외면하는 부모나 남자 친구에게 보란 듯이 씩씩해진 걸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모성애가 애를 어른으로 만든 걸까.
그 집 뒷방은 부엌이 없는 대신 뒷문과 가까워 주인이나 주변인과 마주치지 않고 바로 외부로 나가는 장점이 있다. 누군가와 말썪고 싶지 않을 때 기거하는 방정도의 구조랄까.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부엌이 없으니 본인의 식사는 밖에서 해결하고 애기는 간단한 전열기로 때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불편을 감수하고 근 2년을 그곳에서 기거하면서 갓난애 기를 혼자 키우고 같은 시간에 애를 맡기고 뭔가를 하러 간다는 의지가 대단해 보였다. 그런 불굴의 의지가 애를 낳게 만들었을 것이고 주변의 외면에도 기죽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게 아닐까. 보통 여기 애들은 고교 졸업 후 독립을 기본적으로 하는데 그 아이의 경우 졸업 이전에 남자 친구를 만나 애를 만들면서 좀 더 일찍 독립을 했을 것이다. 이런 결단에는 부모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부모 또한 독립된 인격체로 딸을 대하면서 서서히 멀어져 간 게 아닐까. 이런 모순된 틈을 정부에서 메워주긴 하지만 만족한 수준은 아닐 것이다. 또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정부지원금 말고도 더 있을 것이고 그걸 생각하면 비슷한 연령대의 딸이 있는 아버지로서 쉽게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