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소소한 일상 <58>
그가 운영하는 골프장의클럽하우스. 그 뒤에 그의 살림집이있다.
18년 전쯤일까. 이민 온지한2년차되는 신출내기 시절 얘기다. 인도 사람에게 세탁소를 인수하고 밤낮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그때다. 언어도 서툴고 새로 해보는 세탁업이 손에 익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천사라고 생각했었던 백인들의 교활한 민낯을 알고부터는 공황에 가까운 충격에 휩싸였던, 힘든 시기였다.
어느 여름의 토요일. 5시 문을 닫고 휘청거리는 심신을 위로할 겸 가까운 골프장에 부킹도 안 하고 갔다. 4명 한조에 두 명의 백인 청년과 한 동양인과 한조가 됐다. 1번 티박스에서 간단히 인사를 할 때만 해도 난 그 동양인이 일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배달민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생각을 못하게 할 비주얼을 가졌었다. 일단 남자가 뒷머리를 길렀고, 그 기다가 약간 파마기를 넣었고, 눈가 선함에 끌리는 동족 의식이 전혀 작동을 하지 않았다. 뭐 아무렴 어때. 일본인인 든 중국인이든 한 라운드 돌면 끝인데...
1번 홀 티샷을 하고 두 번째 샷을 할 때 약간 우리말 비슷한 게 귓가를 스쳤다. '신발끈'처럼 들렸는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본말도 유사한 발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번 홀에서는 의도적으로 조금 그 사람과 밀착해서 움직였다. 그는 샷이 맘에 들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말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몇 번 들어 본 결과 그것은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에 가까웠다. 용기를 내서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 그는 흠찟 놀랬다. 제눈에도 내가 한국사람으로 안보였다는 뜻이었다.
안면을 트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 말을 대충 정리해보면 그는 내일부터 이골프 장에서 이틀 동안 열리는 레슨 프로 자격증 시험을 치기 위해서 앨버타에서 왔고, 그 자격증을 따서 생업을 하려고 하는 것보다 그냥 놀기 뭐해서 뭐라도 하나 하자는 심정으로 도전한다고 말했다. 이민 온 얘기며 현재 앨버타 경기, 한국 이민자들의 경제 활동, 그리고 골프 토너먼트 등 국경 없이 말을썪었다. 그는 말주변이 좋았고 자신감이 묻혀있었다. 그가한 말 가운데 앨버타는 한국 이민자가 밴쿠버에 비해 현저히 적기 때문에 한 다리 걸치면 다 안다고 했다. 그래서 중학교 친구 김 모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또 한 번 놀래는 시늉을 했다. 옆집에 살고 아주 친하게 지내는 친구라고 했다. 참 세계는 좁구나. 1000 킬로 넘게 떨어진 곳에 살고 있으면서 서로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는 게 우연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집이 이골프 장부근이니깐 일단 집에서 숙식을 하는 게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다. 그는 흔쾌히 오케이 했다. 골프장에서 만난 낯선 사람을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집으로 데리고 가니 와이프가 약간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 당시만 해도 남의 집 곁방살이 하는 입장이라서 가급적 남을 모시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는데 난데없이 누굴 통보도 없이 데리고 오니 그럴 만도 했으리라. 지금 생각으로. 그땐 와이프나 얘들의 입장을 헤아릴 깊은 사고가 부족한 시기였었다. 저녁을 먹고 큰애 방을 비워줬다. 와이프가 조용히 나무랐다. 일일이 옳은 말이지만 돌이킬 수는 없었다. 이렇게 하룻밤을 묵고 그는 차가운 공기의 기운을 감지했는지 가까운 모텔로 갔다. 이것으로 그와의 하루 인연은 종지부를 찍었다.
2020년 8월 10일. 캠룹스.
여름휴가 겸해서 그곳으로 골프투어를 떠났다. 일요일을 끼워서 2박 3일에 4 라운딩. 빡빡한 일정이지만 파워 카트를 타고 충분한 음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었다. 첫날 일요일. 380킬로 정도 운전해 간 곳에서 한 라운드 돌고 이튿날은 36홀. 오전 라운드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해서 한 라운드를 한 뒤 그곳 골프장 안에서 바비큐를 하기로 했다. 두 번째 라운드를 돌기 위해 골프장에 도착하니 그곳 한인 주인이 우리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가 그였다. 머리는 모조리 흰색으로 변해 있었지만 큰 키에 풍채는 그대로였다. "절 알아보시겠슈"먼저 말을 걸었다. 그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희한한 인연이다. 오로지 골프로만 연결되는. 어쨌든 뜨거운 악수를 했다.
18홀을 마치고 그가 특별히 준비해둔 바베큐장으로 갔다. 야외에 긴 테이블을 놓고 그 옆에 숯으로 고기 구울 준비를 완벽히 해놓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굽겠다는데도 끝내 집게를 건네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허기 진속에 술과 고기 밥을 허겁지겁 몰아넣었다. 조금 인터벌이 늘어질 때쯤 주변 경관을 둘러봤다. 골프장 내에 집을 지어 거주하면서 텃밥을 일궈 각종 채소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행 때문에 개인적인 얘기는 진하게 못했지만 간간히 그동안 삶의 궤적을 압축해서 서로 말했던 것 같은데 다음날 아침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전혀 머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그와의 두 번째 인연은 막을 내렸다.
세 번째는 몇 년 뒤 어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