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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뜬구름 Feb 24. 2021

20불에 멘붕 온 할아버지

캐나다의 소소한 일상 <59>

우리가게 카운터 탑. 50센티 남짓한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많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백인들의 민낯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며칠 전 70대로 보이는 남자가 뭔가를 찾으러 세탁소로 왔다. 백인들의  나이를 추정하기 힘들긴 하지만 일단 60대를 지나 70대를 넘기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약간의 일관성을 가진다. 얼굴이 빨간색으로 변하고, 얼굴 반점 조금, 오랜 은퇴생활에서 오는 나태함과 와이프에 대한 맹목적 충성 등이 묻어 나온다. 반면 현직에 있는 70대는 50대를 뺨칠 정도로 건강해 보인다. 이노인도 집돌이 첫 번째 부류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와이프 재킷을 찾으러 왔다. 언제 무슨 옷이라면서 세탁전표를 찾는 시늉을 했다. 대부분 못 찾는다. 그러나 나는 대략 알고 있다. 요즘 코로나가 덮친 뒤 좋은 점이라면 손님 옷을 대부분 다 외운다는 것. 그 노인 부인 옷은 물론이고 그 부인의 인상도 머리에 남아 있었다. 그맘큼 요새 손님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간혹 오는 손님도 옷 가짓수가 대폭 줄었다. 그러니 손님은 물론이고 옷의 특징까지도 며칠간은 머리에 남아있게 된다.


그가 전표를 찾기 전에 이미 내가 옷을 찾아서 보여줬다. 문제는 그 뒤 발생했다. 세탁비 20불을 받고  금전 등록기에 넣은 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짧은 순간에 20불짜리 한 개가 없어졌다며 빨간 얼굴이 갑자기 새파랗게 변했다. 20불에 저렇게 놀래다니 내가 더 놀랬다. 아내가 분명 2장을 줬는데 한 장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며 초긴장 모드로 분위기를 몰아갔다. 이런 게 흔하지는 않지만 간혹 있어왔기 때문에'또 생떼 쓰는 인간 하나 만났네'하면서 가만히 그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는 우선 자기지갑을 꺼내서 내용물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집돌이 노인답게 정리 안된 그의 지갑에는 많은 것들이 잠자고 있었다. 국가연금을 현금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되는  고액권 지폐 몇 장이 보였으나 그의 말대로 20불짜리는 없었다. 그리고 몇십 년은 된듯한 빛바랜 각종 영수증,  젊은 여자와 다정히 찍은 사진과 손주쯤으로 보이는 몇 장의 사진, 각종 크레디트 카드와 쇼핑몰의 카드까지 엄청난 양이었다. 아마 뒷주머니에 넣고 낮잠이라도 자면 허리 다칠 정도의 두께였다. 내게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나씩 꺼내 카운터에 펼쳤다. 그의 말과 행동, 그에 따른 의지를 봐서는 완전히 뻥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카운터의 돈통에 들어있는 지폐를 바닥부터 보여줬다. 20불짜리 몇 장이 있었지만 그의 20불은 세로로 약간 구겨진 것이었고 이미 존재했던   돈은 구김 없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그는 와이프의 심부름을 하면서 부부별산제에 따라 제 돈은 지갑에 모셔두고 부인한테서 받은 20불짜리는 손에 쥐고 오면서 약간 구김이 갔던 것으로 보였다. 이 사실도 그는 까먹고 있었다.여기 20불짜리는 플라스틱이어서 접어도 선이 남지 않지만 구김자국은 남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렵지 않았다. 또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카운터를 비추는 2대의 카메라가 전혀 사각 없이 24시간 가동되기 때문에 금방 드러난다.



내가 카운터를 비추는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면서 " 같이 CCTV 돌려볼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이미 약간의 검정과 나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듯 주춤하면서 "나중에 혼자 보고 찾으면 전화 연락 해달라"면서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카운터 아래서 문제의 20불을 찾았다. 그지폐도 내게 준 것과 똑같이 돌돌 말아서 손에 쥐고 온탓에 세로로 주름이 가 있었다. 그것만 봐도 그의 돈이 확실해 보였다. 그는 갑자기 죽다가 생환한 사람처럼 환해지면서 찾은 돈에 취했는지 짧게나마 의심한 나의 기분은 고려하지 않고 문을 힘차게 열고 나가버렸다.

그는 분명 여느 때와 똑같은 맛있는 저녁을 와이프로부터 제공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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