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토니 Apr 06. 2020

나의 커피 입문기


간혹 커피를 마시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대학생 때 시험을 앞두고 밤을 새보겠다며 투샷으로, 아메리카노도 아닌 에스프레소를 마시고는 두근대는 심장 때문에 공부도 못하고 그렇다고 잠도 못 든 채로 밤만 꼬박 새워서 시험을 쫄딱 망한 뒤로 "커피는 나하고 맞지 않는 음료야."라고 선을 딱 긋고 살았습니다.


그 뒤로 커피란 건 입에 거의 대지도 않았어요.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동료들과 카페를 갈 일도 많지만 그래도 저는 늘 커피를 피해 살았습니다. 몇 층 카페가 커피를 더 잘하더라 하는 사람들의 얘기에, "커피가 다 똑같지. 그 쓴 게 달라봐야 얼마나 다르겠어." 하곤 했죠. 그리고는 돈이 좀 아깝지만 커피보다 2천 원쯤 더 비싼, 메뉴판 구석에 있는 밀크티나 에이드를 시켰습니다.


그러던 작년 여름, 1층에 카페가 있는 작은 건물로 이사를 왔습니다. 6층짜리 건물에 1층엔 카페, 2층부터 6층까지는 가정집이 있는 상가주택이에요. 재미있게도 1층 카페 주인아저씨가 건물의 주인이었습니다. 인상이 좋은 아저씨는 전세 계약을 하던 날, 입주자들은 천 원씩 할인해준다며 커피 마시러 자주 오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알았는데 아저씨는 커피에 애정이 매우 많은 분이더라구요. 대로변도 아니고 동네 주택가에 위치한 작은 카페지만 카페는 아저씨가 엄선한 원두와 아저씨의 비법으로 운영되는 특별한 공간처럼 보였습니다. 건물 1층에 있다 보니 오다가다 가끔 들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저씨는 저에게, 커피를 기막히게 뽑아주는 커다란 기계나 얼음을 맑고 투명하게 뽑아내는 더 커다란 기계 같은 것들을 자랑하곤 했어요. 그때까지도 저는 그냥 커피에 대단한 자부심이 있으신가 보다 하고 무심하게 메뉴판 구석의 차 메뉴를 시켰습니다.


커피 향이 우수수수


이사를 온 지 두어 달이 지나고 날이 제법 선선해진 어느 주말 아침이었습니다. 집 복도로 나왔는데 건물에 짙은 커피 향이 기분 좋게 퍼져있었어요. 커피를 마시지 않는 저는 커피 향을 좋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날따라 건물에 퍼진 커피 향이 너무 향긋하더라구요.


그렇게 향기에 이끌린 저는 1층 카페를 들렀습니다. 어떤 게 좋은지 몰라 왠지 쉬워 보이는 라떼 한 잔을 주문했어요. 아저씨는 고소한 원두와 새콤한 원두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셨고, 저는 역시 더 편안할 것 같은 고소한 원두로 골랐어요. 약속대로 할인도 천 원 받았습니다.


아저씨는 전에 자랑했던 큰 기계를 뚝딱뚝딱 두드리고 눌러서 커피를 뽑아내고는 우유와 함께 타서 내놓으셨어요. 그렇게 받은 라떼 한 잔을 들고 집으로 돌아온 저는 첫 모금을 마셨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저를 카페로 이끌었던 커피 향이 그대로 들어있었거든요. 그 날이 아마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혼자 커피를 마신 날이었을 거예요. 주말의 여유와 커피의 진하지만 무겁지 않은 향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침이었어요.


두 잔을 한 번에 맛보는 사람이 있다


그 뒤로 저는 1층 카페의 단골이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새콤한 원두로 어떤 때는 드립 커피로 종류도 바꿔가면서 말이죠. 가끔은 아저씨가 본인이 마시려고 내린 커피라며 공짜로 한 잔씩 주기도 하셨어요. 가끔 두 잔을 함께 마시며 맛을 비교해보기도 했구요. 전엔 몰랐던 '커피 맛의 차이'도 조금씩 알게 됐어요.


카페인이 주는 불편함이 단번에 사라진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런 불편보다도 아침에 뽑아낸 커피의 따뜻한 향기가 머리를 차분하게 가라앉혀주는 그 기분이 더 좋더라구요. 게다가 한 잔 두 잔 즐기다 보니 카페인에도 조금씩 적응하게 됐어요. 이제는 자신 있게 커피를 즐긴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해졌습니다.


그렇게 한 발씩 커피에 다가가던 저에게 오늘은 아주 큰 한 발을 내디딘 특별한 날입니다. 바로 모카포트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1층 카페의 아저씨가 내려주시는 커피도 참 좋지만 이제는 제 손으로 직접 커피를 뽑아보고 싶더라구요.


모카포트는 이렇게 생긴 친구입니다


네, 맞습니다. 이 글은 모카포트를 가지게 된 게 감격스러워서 쓰게 된 글입니다. 어엿한 홈카페의 오너가 된 날을 기념하고 오늘의 이벤트를 축하받고 싶었어요. 구입 & 개봉기를 쓰는 대신 커피 입문기를 남겨 길지 않은 커피 인생이지만 홈카페까지 오게 된 나름 재미있었던 여정을 함께 나누고 싶기도 했구요.


새로 배달된 모카포트를 닦고, 세팅하고, 첫 커피를 추출하면서, 내가 마치 멋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문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구요. 아마 <알쓸신잡>에서 멤버들에게 모카포트로 우아하게 에스프레소를 내려주던 김영하 작가님의 모습을 상상했나 봅니다. 물론 현실은 모카포트를 쓰는 게 익숙지 않아 우당탕탕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지만요.


아무튼 오늘 저는 기분이 좋습니다. 커피는 잠을 방해하는 음료라고 하는데요, 오늘 밤에 커피를 생각하며 잠에 들 것 같아요. 얼른 밤이 지나고 모카포트의 달달달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퍼지는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사진 출처

- 카페 바: Photo by Raychan on Unsplash

- 커피콩: Photo by Mike Kenneally on Unsplash

- 에스프레소 두 잔: Photo by Kevin Butz on Unsplash

- 모카포트: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