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일인의 삶≫에 대한 서평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이라는 책이 있다.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인데 이것이 책의 주제이다. 여기에서 쓰인 평범성이란 말은 the banality를 번역한 것인데, 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한 보고서)’이라고 번역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저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악행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예로 드는 것은 무리가 좀 있긴 하다. 1990년대 이후에 자료가 공개되면서 아이히만을 평범한 사람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2001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베티나 스탕네트가 쓴 책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아직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다)를 보면 그는 명령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었다. 인종말살정책를 포함해 온갖 전쟁 범죄를 앞장서서 저질렀던 슈츠슈타펠 부대의 중령으로 홀로코스트의 실무책임자였던 것이다. 자발적이고 구체적인 악행의 증거들은 충분해 보인다.
거기에 비하면 이 책, ≪어느 독일인의 삶≫의 주인공인 브룬힐데 폼젤는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예로 보인다. 그는 나치 독일 시절 괴벨스의 속기비서였다. 괴벨스는 나치독일의 선전장관으로 히틀러를 우상화해서 독재자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판과 방송, 영화 등의 미디어를 통제하면서 유대인을 탄압하는 등 나치 정권의 악행의 최전선에 섰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속기비서였던 사람은 평범한 사람일까? 시스템에 적응하고 출세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평범한 사람’으로서 명령에 따르기만 했던 사람일 수 있을까?
이 책은 바로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브룬힐데 폼젤은 어린 시절에 우연히 뛰어난 속기 실력을 가지게 되고, 그 때문에 방송국에 취직할 수 있었다. 나치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는 조금도 관심이 없지만’ 그저 많은 월급을 받고 더 나은 사회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나치당에 가입한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내용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순종을 배웠어요. 가정 안에서 사랑과 배려 같은 건 부족했죠. 오히려 우리는 순종하는 가운데 서로를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일에 익숙해졌어요. 그러니까 이런 일들을 통해 원래 아이들에게는 없던 특성이 우리 속에서 깨어난 거죠.”(30쪽)
이 말은 103세가 되어서야 인터뷰를 통해 털어놓은 것이다. 대략 100년 전의 어린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말이다. 과연 기억인지,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기 위해 끝없이 되새김질한 창작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로 나치당에 관심이 없었음을 강조한다. 그저 속기를 잘하는 성실한 기술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송국에 취직해서 많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당원이 되는 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 서류에 서명을 했어요. 매달 당비가 2마르크나 됐어요. 제법 부담이 되는 금액이라 마음이 아팠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아팠던 것은 입회비로 10마르크를 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정말 쓰라렸죠. ......(중략)...... 그럼에도 나는 가입 서류에 서명을 했어요. 방송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10마르크 정도는 금방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실제로도 그랬어요. 아무튼 이렇게 해서 나는 당원이 되었어요.”(65쪽)
이 평범한 속기 기술자가 권력의 핵심부에 스며들 수 있었던 것은 상관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과 충성심이었다. 이 책에는 당시에 저질러졌던 끔찍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그에게 그런 일은 자신의 업무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고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다. 그러면서 받은 보상에 대한 만족감을 감추지는 않았다.
“약간 선택 받은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서 일하는 것이 만족스러웠어요. 모든 것이 편했고 마음에 들었죠. 쫙 빼입은 사람들, 친절한 사람들……. 그래요., 난 그 시절 껍데기로만 살았어요. 어리석게도요.”
폼젤의 반성은 이런 정도다. 단지 어리석었다고만 자책할 뿐 자기는 조금도 책임이 없고, 자기 입장이 되면 누구라도 그러했으리라는 것이다. 그 업무라는 것이 죄 없는 사람들을 대량학살하는 것이든 아니든 그런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자기는 몰랐노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조사결과를 보면 그 당시 평범한 독일인들 40퍼센트 정도는 홀로코스트를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사회분위기를 말해주는 시가 하나 있다. 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무심한 ‘악행’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말한다. 기억해 둘 만한 시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
-마르틴 니묄러(1892~1984)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치적 무관심’을 포함한 이 책의 현대적인 의미는 사회학자인 토레 D. 한젠의 해설 부분에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 거기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 있는 수많은 ‘브룬힐데 폼젤들의 악행’을 가볍게 볼 경우 어떤 불행한 사태를 맞을 수 있을 것인지 경고하고 있다. 그 부분이 더 중요하게 읽힌다.
마지막으로 이런 ‘문제’에 대한 현대의 심리학 실험에 대해서도 알아두면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던 시절에(정확하게 같은 시기에) 미국에서는 보통사람들이 사회적 권위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끔찍한 악행을 쉽게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밀그램의 복종실험Milgram experiment*이 진행되고 있었다.
밀그램은 이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보통사람들의 무심한 악행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람들이 파괴적인 권위에 굴복하는 이유가 성격보다 상황에 있다. 사회시스템 속에서 권위 있는 사람의 명령을 받으면 아무리 이성적인 사람이라도 윤리적, 도덕적인 규칙을 무시하고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저지를 수 있다. 그들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