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로 사는 시간

비워진 시간 위에 나만의 하루를 다시 그리다.

by 두니

퇴임 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여전히 알림은 울렸지만,

울릴 이유는 없었다.


눈을 떴는데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기다림도 바람도 없는

허전한 아침이다.


오랫동안 나는

쓸모로 살아왔다.

누군가의 필요였고,

어떤 자리의 책임이었으며,

해야 할 일의 목록이었다.

잘 해내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나를 증명하는 일이라 믿었고,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역할이 멈추자

질문 하나가 남았다.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 사람인가.

알람이 사라진 자리에

넓은 시간이 놓였다.

그 시간은 자유이면서

낯설고 불안한 공백이기도 했다.

무언가로 채워야 할 것 같았다.

새로운 계획과 목표,

또 다른 성취로.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이 시간은

채워야 할 공백이 아니라

들여다보아야 할 여백이라는 것을.

연필을 다시 잡았다.

오래전 좋아했던 선을 따라

천천히 나를 그렸다.

한 줄의 글을 썼다.

누군가를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기 위한 글을.

기도를 드렸다.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기 위해.

퇴임 이후의 삶은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완성된 답을 담지 않는다.

대신,

쓸모를 내려놓은

존재로 살아가는 연습의 기록이다.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그리고 나는 지금,

잘하는 삶이 아니라

존재하는 삶을 배우는 중이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