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자세
내가 피해자 코스프레에 익숙해 있었고 부정적인 마인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여러 번 언급했었다. 아무래도 사람은 타고난 것보다 환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같다는 믿음이 생긴 이유이다. 잘 웃었던 아이가 굳은 표정의 어른이 되는 결과를 나은 것은 나를 둘러싼 환경 그리고 내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용했는지에 대한 결과이다.
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것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 있어서 그런 자리는 되도록 피한다. 그래서인지 무언가를 배우는 데 있어서도 혼자 터득하는 편이다. 혼자 익히는 것은 속도가 느리고 잘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단점을 잘 알지만 그래도 나는 늘 혼자 배운다. 이에 가장 편하고 특화되어 있는 것이 '독서'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책은 내 일상 속으로 조금씩 파고들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내 생애의 가장 많은 독서를 했는데 그때는 그저 재미있어서 그렇게 많은 무협지를 읽었었다. 그 이후로 뜸하다가 내가 엄마가 되면서는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육아서를 펼치기 시작했다. 신생아 시기에는 신체적으로 잘 키우는 법에 집중되었었다면 유아기가 되면서부터는 아이와 소통하는 법 등의 심리적인 부분과 약간의 교육적인 내용이 섞여 있는 것을 읽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을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읽다 보니 다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다. 아마 다른 엄마들도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을 때는 온화한 마음으로 바른 방법으로 아이와 소통하고 화내지 않고 다그치지 않지만 얼마 가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 보면 30대의 나는 나도 미성숙한 어른이었고 내면에는 다 성장하지 못한 아이가 있었는데 욕심이 과했다. 그 당시에는 내 마음속에 분노, 찌듦, 자격지심, 우울감 등의 부정적 감정이 우세했는데 약간의 육아 심리서로 훈풍이 분다고 그걸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어쩔 때는 알면서 나쁜 말, 험한 말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다.
그렇게 40대가 되었고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아이가 커 감에 따라 나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원동력은 역시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거기에 더해진 것이 있다면 자랑스러운 엄마,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역시 그 방법은 독서였다. 이번에는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나를 키우고 싶었다. 가슴이 떨리는 내용도 있었고 더 잘 살아보려는 동기 자극도 되었지만 이 역시 육아서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책들, 인기가 많아지니 오히려 선동적인 책들이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물론 좋은 책들의 메시지는 큰 울림을 주었지만 그놈의 출판계의 트렌드 따라잡기에 놀아나는 느낌이 없다면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가 커가면서 뭔가 알려줄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조금씩 고전을 비롯한 문학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교과서에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재미없다고 여겼던 한국의 근현대 문학 작품들을 읽었고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세계 고전도 도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어른이 되어서 생각이 성장한 것인지 그 재미없던 한국 근현대 작품들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심리를 이해할수록 매력이 느껴졌다. 더불어 역사적인 내용들에 아픔을 느끼기도 하면서 문학 작품에 대한 눈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모든 문학 작품에는 누군가의 인생이 온전히 들어있다. 내 주위에서 접할 수 없는 삶, 감히 상상으로만 생각해 볼 수 있는 삶, 너무도 평범한 삶 등을 모두 경험해 볼 수 있다. 등장인물들의 선과 악을 떠나서 그 인물에 몰입해서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깊이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지만 문학 속의 인물들은 나쁜 행동을 해도 이해할 만한 여지가 있다. 왜 그럴까? 독자로서의 나는 그들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한 발 떨어져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삶을 알기 때문에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을 읽는 것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내용을 곱씹어 보며 독서 노트를 쓰고 블로그에 리뷰를 남기면서 내가 조금씩 변하는 것을 느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소설이나 시를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같은 작품이라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정답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떤 작품에 대한 누군가의 견해가 반드시 절대적으로 맞거나 틀리다고도 할 수 없다. 사람마다 의견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내가 어떤 시에 대한 생각을 쓴 글이 대부분의 생각과 다른 적이 있었다. 그 글에 어떤 분이 내 생각을 초보적이라는 듯 비난의 댓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이 글은 내 생각일 뿐이고 시에 대한 느낌은 모두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적 감사합니다.'라는 대댓글을 남겼었다. 그리고 그 후 그 댓글은 삭제되었다.
문학에서 나는 다른 이에게 공감하는 법을, 이해하는 아량을, 삶을 조금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고, 누군가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마음과 불의에 항거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내 아이와 남편과 대화할 수 있는 마음의 공간과 대화는 대화일 뿐 내 마음대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잘못을 지적, 비난하고 내 위주의 조언을 하려던 과거의 습관을 바꿀 수 있었다.
문학에는 세상이 들어있다. 문학은 내게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게 해 주었고 나를 돌아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문학은 내게 가장 뛰어난 육아서, 심리서, 자기 계발서, 역사서였다. 그리고 나는 내 인생이라는 문학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 속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나는 개인적 욕망 없이 한 발 자국 떨어져서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기만 할 것이다. 해피엔딩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