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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정은 Aug 07. 2023

장독대

여름의 기억

지상 주차장을 좋아한다. 지하에서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보다는 지상에 차를 세우고 나무를 구경하고 그림자도 보고 바람 시원하게 통과하는 통로를 지나 놀이터도 보면서 집으로 걸어 들어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면 바로 앞엔 모과나무가 있다. 봄에는 분홍색 꽃이 피고, 꽃이 떨어지면 둥근 열매가 맺히는데 점점 커지다가 노랗게 익어서 '기는 한데 멀미 날 것 같은' 특유의 향을 풍긴다.


우리 단지는 베란다 바깥으로 화단이 있다. 꽃이나 나무 키우는 분들도 계시고 빨래도 말린다. 이 날은 장독대가 눈에 들어왔다. 크고 작은 장독대와 소쿠리 몇 개. 한낮의 볕을 쬐는 장독대를 손으로 만지면 따뜻했던 생각이 났다. 볕이 좋을 땐 뚜껑을 열어두라고 엄마가 말했는데 그때마다 살짝 손가락으로 찍어먹던 고추장 생각도 났다. 매운데 또 먹고 싶은 맛. 된장독을 열면 얼굴이 찡그려졌고, 간장도 별로였다. 나는 고추장독을 좋아했다.


장독대 이야기를 원고에 옮겼다.



집집마다 똑같은 구획으로 나뉜 아파트. 하지만 유난히 눈에 띄는 집이 있다. 어떤 집의 베란다에는 키 작은 장독대가 나란히 놓여있다. 그 위 빨래건조대엔 각을 맞춘 수건이 보기 좋게 걸렸다.

집 바깥에 빨래를 널고 장독대를 내놓는 일이 전에는 무척 흔했다. 모처럼  햇살 좋은 날이면 집안에 있는 모든 장독대의 뚜껑을 열었다. 붉은 고추장은 따가운 햇살을 먹고 더욱 매콤하게 익었고 된장은 한층 구수해졌으며 간장은 달고 짭조름해졌다. 솔솔 새어 나오는 장 익는 냄새와 햇살이 뒤엉켜 한없이 나른하던 시간, 유난히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기도 했는데 십중 팔구는 외출한 엄마의 다급한 전갈이다.

-비 올 것 같다
뚜껑 덮어라.

마른하늘에서는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졌다.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당황해 급히 장독의 뚜껑을 덮고 있으면 바람처럼 달려온 다른 가족이 빨래를 걷었다. 해가 뜨고 비가 내리는 일이 그땐 참 중요했다.

이어지는 곡

수잔 잭스, [Evergreen]



노래 듣는 사이, 빨래 걷으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고 어떤 청취자가 이야기했다. 장독대 깨진 조각을 빻아서 소꿉놀이 하던 이야기도 왔던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시절을 살아온 청취자가 내 든든한 백이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써도,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이미 보물이라서, 그 기억을 꺼내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빛난다. 공감해 주셔서 늘 고마운 아침 가족들.


#라디오 #오늘아침정지영입니다 #평소의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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