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의 <아이 캔 스피크>(2017) 리뷰
이 영화는 유려하다. 일단, 연출부터가 그렇다. 위안부 소재를 가진 한국 영화 대부분은 특이하게도 그로테스크함을 자랑한다. 역사의 피해자를 위로한답시고 높은 시선에서 그녀들의 악몽을 다시 재현하는데 에만 그친다. 최근, 류승완 감독 <군함도>(2017)도 그랬고 조정래 감독 <귀향>(2015)은 특히 그랬다. 관객은 그 악몽을 보고 분노한다. 하지만 정확한 문제의식은 갖지 못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기분이 찜찜한 건 덤이다. 김현석 감독 <아이 캔 스피크>(2017)는 이러한 무지한 한국 영화 시장에서 마침내 태어난 기적 같은 영화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감독의 의식이 스며있다.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 미리 말하자면, 이는 나옥분 인물에게만 주어진 대사가 아니다. 이 영화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경계를 효과적 스크린 디렉션으로 나눴다. 말하는 자의 시선은 스크린의 오른쪽을 향하고 듣는 자의 시선은 스크린의 왼쪽을 향한다. 즉,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경계를 정반대의 위치에 팽팽히 놓는다.
영화 초반, 나옥분이 구청으로 들어오는 씬을 살펴보자. 나옥분은 마을 속 벌어지는 불법을 고발하는 자다. 하지만 박민재와 막걸리 마시는 씬에서 볼 수 있듯이. 나옥분이란 인물이 법치주의 사상을 내세운 딱딱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길거리에서 막걸리 마시는 행위가 불법임을 듣고도 가만히 있음을 보았을때) 그녀가 마을의 불법을 고발하는 행위는 사건 사고를 예방하기 위한 마을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관심과 애정이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지 못한 구청 직원과 마을 사람들은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그녀를 비방한다. 이때, 나옥분의 시선은 스크린의 오른쪽을 향하고 구청 직원과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스크린 왼쪽을 향해 서로가 팽팽하다.
반면, 나옥분이 박민재와 서로 친해지는 과정을 보자. 박민재가 영어를 계기로 나옥분 인물의 사정을 알아갈수록 둘의 시선 각도는 점점 좁혀진다. 처음에는 180도의 팽팽한 각도였다면 영화 종점에서는 정면 대 정면으로(‘오버 더 숄더 쇼트’ 활용) 그 시선의 경계가 좁아지다 결국 허물어지기까지 한다. 말하는 자가 듣는 자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고, 듣는 자가 말하는 자의 위치에 놓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러한 스크린 디렉션을 통해 감독이 말하려고 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결국, ‘아이 캔 스피크’는 나옥분 인물에게만 주어진 대사가 아니라, 박민재의 대사이며, 구청과 마을 사람들의 대사이며, 관객이 마주해야할 대사다.
박민재는 나옥분의 사연을 진심으로 귀담아듣고 그를 도우려는 인물이다. 나옥분의 증언이 미국 의회 청문회에 알려져 인정을 받는 데에는 박민재의 용기가 함께해 드러날 수 있었다. 마침내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한 그녀와 그 모습(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의 위치는, 영화의 처음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위치'처럼 180도로 팽팽하다. 감독이 이를 통해 말하려는 의도는 박민재의 행동과 일치할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 결국 관객 또한, 이제 나옥분의 증언을 들었으니 그들도 시대에 말할 줄 알아야한다. 시대의 초상은 언제나 배움의 대상이다. 또 한 번, 나옥분 증언(위안부 할머니) 같은 기적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역사를 이해하고 그에 힘이 되려는 주체적 행동이 함께 해야 한다는 감독의 촉구이자, 이 시대의 촉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