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가버나움>이라는 영화를 보고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레바논의 베이루트 지역을 배경으로 빈민촌의 현실을 다루는 이 영화는 2018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상을 받았다.
당시 영화를 보고 며칠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충격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글도, 하다못해 간략한 코멘트조차도 남기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실제로 할 말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남는 것은 오로지 거대한 절망감과 무력감뿐.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를 손대야 할지, 무엇에 대해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나처럼 비교적 안전한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안락하게 사는 사람이 감히 이런 문제에 입을 여는 것이 가당치 않은 느낌까지 들었다. 영화 속 인물들에 비하면 내가 하는 고민과 일상에서 겪는 고통은 모두 먼지와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돈에 팔려간 소녀가 남편에게 학대를 당하며 출산 계획 없이 아이들을 줄줄이 낳고, 그렇게 낳은 아이들을 다시 아주 어린 나이부터 학대와 노동에 노출시키는 삶. 딸들의 경우 엄마와 마찬가지로 2차 성징이 나타나자마자 나이가 많은 남자에게 팔려가서 성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삶.
그러다 너무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한 소녀가 출산으로 생명이 위태로워 응급실에 실려가더라도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아무런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대로 목숨을 잃는 삶. 부모가 일을 하거나 다른 형제를 건사하는 동안 케어하기 어려운 막내는 발목에는 쇠사슬을, 엉덩이에는 기저귀를 차고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 있는 삶.
고용주에게 강간을 당하여 임신을 한 가정부가 어쩔 수 없이 출산을 한 이후 불법체류라는 신분 때문에 아이를 빼앗길까봐 일을 하는 동안 화장실에 아이를 숨겨놓을 수밖에 없는 삶. 훗날 가정부네 집에서 먹고 자는 대신 그녀의 아이를 보살피기로 한 어린 소년이 엄마가 사라진 아기를 돌보기 위해 갖은 애를 쓰다 결국 ‘업자’에게 울면서 아기를 넘길 수밖에 없는 삶.
그야말로 온갖 폭력과 빈곤이 대물림되는, 아니 대물림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럽고 버거웠다. 저런 삶에 처한 이들이라면 삶이 지옥처럼 느껴지는 것이, 자신을 왜 낳았냐고 부모를 저주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을까. 실제로 출생기록도 없고 자신이 몇 살인지도 모르는, 12살 남짓의 주인공 자인은 자신을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고소하는데, 영화는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는 바로 그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번에 캐서린 부의 <안나와디의 아이들>이란 책을 읽고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미국에서 기자로 일하던 캐서린 부는 평소 빈곤층에 관심이 많았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에 대한 글을 주로 썼는데, 우연히 인도인 남편을 만나게 되면서 초점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이들로 옮긴다.
이 책은 그녀가 뭄바이의 부유한 지역 바로 옆에 붙어있는 빈민촌 ‘안나와디’ 지역을 4년간 취재한 결과물로, 등장인물은 모두 실명이며 등장하는 사건 또한 전부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재미있는 점은 르포임에도 불구하고 주요 등장인물이 정해져 있고, 나름의 플롯을 갖추었으며,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해서 마치 한 편의 대하소설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책은 장애여성인 파티마가 몸에 불을 지른 장면에서 시작하여 이 사건으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주인공 압둘을 따라가며, 파티마가 어째서 그러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압둘이 도망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후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압둘의 주변 인물들이 어떠한 선택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그려낸다.
그리고 그를 통해 빈민촌에도 엄연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들 모두 살아남기 위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왜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연대하지 못하고 눈앞의 작은 이익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지, 어째서 인도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끊이지 않는 것인지, 한 사회를 ‘나아지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지, 도시의 개발과 발전 뒤에 어떠한 그림자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읽으면서 매 페이지 등장하는 참혹한 상황에 마음이 무겁고 참담한 것은 물론, 인도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는 부정부패 시스템에 대해서는 황당할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어서 혀를 차게 되는 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가버나움>을 볼 때마다 조금은 덜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었던 까닭은 책 전체에 걸쳐 저자의 희망적인 시선과 낙관이 녹아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너무나도 어리석고, 사악하고,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인간들이지만, 그 안에는 그래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순수한 선의와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와 바램을 가진 사람들도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 그 사실을 저자가 강하게 믿고 있고, 자신의 글을 통해 증명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늘 그렇지만, 인간이란 살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망가지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망가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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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얼음은 성분이 같았다. 압둘은 사람도 같은 성분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압둘 자신도 경찰과 특수 행정관, 칼루의 사인을 조작한 시체 안치소의 의사처럼 냉소적이거나 부패한 사람들과 근본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몰랐다. 재활용품을 분류하듯 실질적인 성분으로만 인류를 분류한다면 거대한 하나의 더미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얼음은 원래의 성분인 물과 다르며, 압둘이 보기엔 물보다 나았다.
압둘도 자신이 이루어진 성분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뭄바이의 더러운 물속에서 얼음이 되고 싶었다. 이상을 갖고 싶었다. 이기적인 이유에서 발로한 것이겠지만 그가 바라는 가장 큰 이상은 정의 실현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p.323-324
빈민촌 주민들이 함께 모여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드물었다. 심지어 공항 공사에 대해서조차.
무력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결핍을 똑같이 무력한 다른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가끔은 서로를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가끔은 그 과정에서 파티마처럼 스스로 무너졌다. 아샤처럼 운이 좋은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일생일대의 기회를 가로채서 팔자를 고쳤다.
뭄바이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다른 곳에서도 만연했다. 전 세계로 무대를 확대한 시장 자본주의 시대에도 희망과 불만은 협소한 지역 안에서 옹색하게 이해됐고, 공통된 고통에 대해서는 둔감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연대하지 않았다. 일시적이고 알량한 이익 앞에서 서로 치열하게 경쟁했다. 그리고 하류 도시의 이런 투쟁은 전반적인 사회구조에 희미한 파장을 일으키다 잦아들었다. 투쟁은 부자 동네로 진입하는 입구에서 어쩌다 소동을 일으킬 뿐, 그곳에 균열을 야기하지는 않았다. 정치인들은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했다.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무시했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불평등한 도시는 비교적 평화로운 상태를 그럭저럭 이어갔다. -p.349
멀리서 보면 잊기 쉬운 사실인데 알량한 이익과 한정된 터전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에서 부패의 지배를 받는 하류 도시의 지친 주민들이 선한 태도를 유지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놀라운 점은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선량하며,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이다. -p.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