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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취방스님 Dec 02. 2021

깨우침

욕심의 끝은 없다.


나는 가끔씩 너튜브나 다른 매체를 통해 종교인의 얘기를 접한다. 물론 내가 속해 있는 종교 쪽에 얘기를 많이 찾아서 보는 편이다.

사실 종교적 믿음이나 어떤 기도의 양식을 찾아보기 위해 찾아보는 것은 아니고 가끔 내 삶이 답답할 때 어떤 길이 있을까 해서 기웃기웃하는 수준이다.


오늘도 우연치 않은 기회에 모스 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속세에 살면서 스님의 얘기는 지키기 힘든 계율 같을 때가 많은데, 이 스님의 강의는 말 그대로 간단하고 명료하다.  가끔은 나도 모르게 내 무릎을 칠 때가 있다.

사실 한 발짝 물러나서 세상일 지켜보면 참 별거 아닌데 일단 나라는 존재가 앞세워진다. 거기에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것들이 섞이면서 분노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 때가 있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구독자 분들도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고 중년이라는 인생의 중반기를 넘어서다 보니 항상 합리적인 것을 찾는다. 물론 때로는 별거 아닌 사소한 일로 울컥할 때도 있지만 이런 나보다 더 경험하신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인생의 길을 밝힐 때가 있다.


우선 살다 보면 우리는 억울한 일도 많이 겪게 되고 또 화나는 일도 겪게 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내가 가진 것에 대해서는 더 가진 사람과 비교하려고 애써 끝내 나의 비참함을 세상 탓으로 돌리려 한다. 그럼 반대로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그렇지 않다. 조금이라도 힘들 때가 있을 때 우리는 세상 누구보다 지금의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 또는 세상의 마지막 슬픔을 지닌 사나이”가 된다. 그래서 이참에 슬퍼지지 않는 덜 힘들게 느끼는 방법 몇 가지 소개하기로 한다. 물론 이 방법은 내가 고안하거나, 깊은 사색에 의해 알아낸 것은 아니다. 너튜브에서 보다가 좋았던 것, 책에서 읽다가 이렇게 하면 나도 덜 힘들 수 있겠다 하는 것들 몇 가지 소개하는 거니 편하게 읽어주시길 바란다.


1. 나의 슬픔의 비교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힘들게 사시는 분의 맘으로


어느 날 스님에게 절에 다니는 보살(여신도)님 한 분이 찾아와 상담드릴 게 있다고 얘기를 시작했다.

“스님, 정말 자식 때문에 못 살겠어요!”

“왜?”

“애가 공부를 못해서요”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데?”

“초등학교 때는 줄 곧 1등만 하더니, 중학교 들어와서는 맨날 2등만 해요”

“그래.”


이 보살님이 고민 상담이 끝난 후 다른 보살님이 스님 뵙기를 청했다.

“그래, 보살님은 어떤 고민이 있으셔서 나를 보자고 하셨나요?”

“애가 공부를 못해서요”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데요?”

“초등학교 때는 그래도 중간은 하더니, 중학교 들어와서는 맨날 꼴찌만 해요”

“그래?”

“그런데 스님 방금 전에 나가신 보살님은 무슨 고민 때문에 스님을 찾아뵌 거예요?”

“아! 애가 공부를 못해서 고민이라고 하네요”

“애가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데요?”

“초등학교 때는 줄 곧 1등만 하더니, 중학교 들어와서는 맨날 2등만 한다고”

“아이고! 욕심도 과하다”


이렇게 이 보살님도 고민 상담이 끝났다. 그 후 다른 분이 스님을 뵙자고 하는데 이 보살님은 아무런 말 없이 앉아만 있었다.

“그래, 보살님은 어떤 고민이 있길래 아무런 말씀 없이 이렇게 앉아만 계신지요?”

“아이가 보고 싶어서요”

<법륜스님 법문 중>


물론 위에 이야기는 상황 설명을 위해서 스님이 예를 들어 설명하신 말씀이다. 윗글에서 보았듯 나보다 힘든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지금 당장이야 답도 없고, 죽고 싶은 만큼 힘들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힘들다고 죽고 싶다고 하지만 사람이 그렇게 쉬이 죽어지지 않는다. 사실 이런 생각들이 나를 가둔다고 스님은 말씀하신다. 스스로 힘들다 내 고통이 크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당신은 그래도 행복한 것이다.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참으로 간단한 화두(불교에서, 참선하는 이에게 도를 깨치게 하기 위하여 내는 문제)다. 지금 시대는 청년 실업이니, 노인 일자리니 하는 말들로 세상이 시끄러운 세상이다.

너도 나도 일자리에 목을 매달고 살다 보니, 더 직관적으로 먹고사는 것에 목을 매달다 보니 하루에도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씩 실업자가 양성된다. 물론 안타까운 현실이고 나도 피하고픈 현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막연한 공포감을 갖고 산다.


스님에게 한 분이 질문을 던진다.


“스님, 지금 제가 사업이 힘들어 회사가 문을 닫기 직전입니다.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적 너무 못 살았고, 그 이후 노동 운동을 하다가 취직을 했고, 지금은 조금 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업이 망하기 직전입니다.”

“ 그럼 지금은 뭐하세요?”

“ 그냥 집에서 있습니다.”

“ 집에서는 뭐하세요?”

“ 마음이 불안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습니다.”

“ 그럼 집에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불안의 요소가 사라집니까?”

“ 아닙니다.”

“ 그럼 무엇이 걱정입니까?”

“ 회사가 망해서 처자식이 못 먹여 살릴까 봐 걱정입니다.”

“ 그럼 일단 집에서 있는 동안 밥이라도 하고, 나가서 소일거리라도 찾아서 일을 해보면 어떨까요?”

“~”

“ 제가 한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서울역이나 노숙인들이 못인 곳을 보셨나요? 이분들이 원래 뭐하던 분들이었을까요? 대부분 이분들은 작은 기업을 운영하셨거나 회사 중역으로 일하다가 망하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망한 후 술에 의지하다 보니 결국에는 노숙자로 나온 겁니다. 시골에서 농사 지시고, 배운 것 없어서 막노동을 하시는 분들 대부분은 노숙인 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면서 주변 사람에게 조차 피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벌어지지 않은 일을 걱정할 때 별거 아닌 집안 청소라도 거들어주고, 낮에는 나가 다른 일거리라도 찾아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걱정은 내 마음속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법륜스님 법문 중>


윗글에서 보셨듯이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은 대부분 일어나지 않는다. 외국의 정신분석 연구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걱정하는 일의 90%는 일어나지 않는 다고 한다. 거정은 나를 좀 먹는다. 걱정하는 시간에 좀 더 진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현명하다. 불교에서는 나를 내세우고 나를 높이 평가하는 것을 “아집”이라고 한다. ‘아집’이 일어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내가 무슨 대학을 나왔는데,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데, 내 친구들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 등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아집이 발현한다. 그렇다고 깨우침을 얻기 위해 수도 생화를 하시는 스님들 또는 훌륭한 종교인들처럼 현세에서 살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조금만 나를 옆에서 한 발 물러나 보면 정말 나도 멋진 사람일 수 있고, 걱정하는 것보다 훌륭한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아집”의 족쇄는 늘 나 자신이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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