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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Jun 07. 2022

좋아하는 일이 없어도, 뭐 어때!

올해 초에 편집하기 시작한 책이 드디어 완성을 앞두고 있다. 40대 여성의 성 건강과 행복한 성생활을 위한 교양서가 바로 그것이다. 나도 이제 40대에 접어들었다. 편집자의 눈으로 읽고 타깃의 마음으로 몰입했다. 초고부터 세 번의 교정을 거치는 동안 원고를 6~7번은 정독한 것 같다. 글자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문장을 뜯어보고, 문맥을 뜯어보는 작업이다. 지난주에 나온 조판본을 다시 한 번 정독하고 오늘 검수를 마무리했다. 사소한 수정을 하고 나면 그 많은 글자들은 종이책에 잉크로 새겨질 것이다. 내가 이것저것 고치고 요구하는 게 많아서 공저자 두 분이 참 성가시게 느끼셨을 것 같다. 고생 많이 하셨다.


같은 원고를 여러 번 읽는 건 정말 지루한 일이다. 그 지루한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책이라는 실물이 탄생하는 걸 볼 때면 그동안 고생했던 기억은 초기화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했던가. 그래서 또 한다. 또 새로운 책을 편집하고 맥락을 이해하려 머리를 쓰고 지루함과 싸우는 짓을 또 한다.


내가 편집자가 될 기회는 우연히 얻은 것이었다. 하려고 한 게 아니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했다. 내공이랄 것도 없다. 번역가, 소설가로 살아온 시간이 쌓여서 어줍게나마 경력이 됐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의심했는데, 오호, 그것도 무기가 된다. 베테랑 편집자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편집이 밥도 먹여준다. 본업인 소설보다 벌이가 더 낫....

© frank_leuderalbert, 출처 Unsplash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좋아서 시작한 일은 번역이었는데 실전에서 결국 질렸다. 그래서 지금은 안 좋아한다. 소설은 좋아서 쓴 게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영감이 떠올라서 장난삼아 쓰다가 이야기가 될 것 같아 계속 쓰다가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그만 쓰려다가 꽤 많이 썼길래 이왕 쓰는 거 끝장은 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썼을 뿐. 내가 좋아하는 일 혹은 평생 좋아할 수 있는 일이 수학 정답처럼 딱 딱 정해져 있으면 인생이 참 편하기야 하겠지만 인생이란 앞날 불투명한 맛으로 사는 건데 너무 투명하면 재미도 낙도 없을 것 같다.


난 내 인생이 의미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쓸데없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아서 죄책감이 들 때마다 용서를 구할 상대가 많다. 내 반려자, 부모님, 심지어 집, 노트북 같은 무생물에게도. 밥에게도 미안하다. 축내서 미안하다. 몸은 비생산적으로 가동하는데 마음에는 여유가 없는 듯하다. 늘 의미를 찾으려 하고, 결국엔 찾지 못하는 게으른 나 자신을 꾸짖는다. 다행히 책 편집은 나름 즐겁다.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지식의 향유 그리고 앞으로 내가 계속해서 연마해야 할 기술인 글쓰기. 이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는 작업이 편집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뭐지?'라는 물음은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성취감과 보람을 느끼는 것이, 내가 갈구하던 '의미로 가득한 인생'이 아닐까. 재미는 덤이고. 아, 이왕이면 돈도 좀 벌었으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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