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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 Mar 04. 2021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때

코로나 시대를 맞닥뜨린 비장애형제의 일기

선량한 시민과 좋은 누나 사이

 ‘만약 여기에서 자동차가 강으로 떨어지면  누구부터 구해야 할까?’ 어릴  나는 가족들과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널  이런 상상을 자주 했다. 그러면 수영을 하지 못하는 동생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나는 슬금슬금 창문을 내렸다. 차가 물에 빠지면 창문을 통해 동생을 데리고 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상상은 계속 이어졌다. ‘엄마 아빠가 죽으면 보험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 ‘동생의 병원과 치료실은 무슨 돈으로 다니지?’ 자동차가 다리를  건널 때쯤 되면 나는 창문을 올리며 동생을 보살피기 위해서 돈을 모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동생에게 발달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안 이후, 나의 부모는 동생과 나를 동등하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내게 ‘누나 노릇’을 강요하지 않았다. 부모는 나와 동생 단 둘만 집에 두지 않으려고 했으며, 동생을 위해 요리를 하라고 하거나 청소를 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다리를 건널 때마다 나와 동생이 세상에 달랑 남겨지는 상상을 자주 하곤 했다. 이 상상 속에서 동생은 나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존재여야 했고, 나는 그런 동생을 보살피는 강하고 우직한 누나여야 했다. 나의 상상에 대한 이 전제가 이상하다고 느껴진 것은 장애 인권에 대해 배우면서부터였다. ‘장애는 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장애인은 혐오스러운 존재도, 동정의 대상도 아니다’라는 문장들을 접하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동안 동생을 수동적이고 무능력한 존재로 그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량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욕망과 좋은 누나여야 한다는 강박은 서로 충돌했고, 나는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로를 탓하게 만드는

 이 방황 속에서 나는 길을 찾아야 했다. 동생에 대한 고민은 있는 대로 엉켜버렸고, 학교를 졸업한 후 진행했던 프로젝트는 공중분해가 됐다. 비빌 언덕과 배움에 대한 기회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대학에 가기로 했다. 11년 동안 대안학교를 다녔던 나에게 입시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수시와 정시의 차이가 무엇인지부터 공부했고, 감기는 눈을 부릅뜨며 딱딱한 도서관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연습을 했다. 많은 것들을 두루두루 좋아했던 나의 유튜브 재생목록은 인터넷 강사들이 차지했고, 샤워할 때조차 면접을 보는 양 혼자 거울을 보며 떠들어대곤 했다. 일상이 온통 뒤바뀌기 시작했다. 봄이 지날 무렵이 되자 코로나바이러스 대 유행이 시작되며 도서관은 문을 닫았다. 나는 엄마의 사무실과 동네 카페를 전전했다. 카페 영업이 중지되고 엄마 동료들의 눈치가 슬슬 보이기 시작한 뒤에는 독서실 정액권을 끊었다. 비빌 언덕을 찾기 위해 대학에 간다고 했지만 정착에 대한 기대를 조금도 할 수 없었다.

 나의 동생도 격변하는 상황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 동생은 발달장애 사원으로 한 잡지사에 취업했다. 집안의 경사였다. 동생이 좋아하는 종이, 그리고 그림을 다루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동생이 좋은 경험을 갖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은 동생을 고용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장애 사원과 비장애 사원의 업무를 명확하게 구분했고, 주변 환경에 쉽게 영향을 받는 발달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한 공간이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동생은 자꾸만 자신에게 부여되는 장애 여부와 같은 꼬리표가 거슬리는 듯했다.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동생은 자주 전화를 걸어 불안을 호소했고, 나는 독서실 바깥으로 나가 동생과 함께 심호흡을 했다. 동생은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을 자꾸만 그리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나는 우울해하는 동생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힘든 입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나 역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동생을 돌보며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고 있는 부모에게 징징거리는 소리를 해봤자 철없는 딸이 될 뿐이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라도 집 밖에 나가 종일 거닐거나 여행을 가 요양을 했다면 좋았을 텐데,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는 매일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을 때 동생을 탓하게 될까 봐 무서워졌다. 영영 좋은 누나가 되지 못할 것 같았다.



'뉴 노멀 (new-normal)'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

 “성적은 노력에 정비례한다.” 독서실 책상에 앉아 인터넷 강사가 하는 이런 말들을 듣고 있으면 나는 온 힘을 다해 이들을 비웃었다. 신생아와 함께 집에서 공부하는 수험생과 <스카이 캐슬>에 나오는 금수저 수험생이 어떻게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치매가 온 노인과 단둘이 사는 공시생은?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 아이를 돌봐야 하는 워킹맘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시작된 이후 발달장애인 부모들의 20%가 생업을 포기했다는 기사가 보였다. 제주와 광주에서 발달장애인과 그의 모친이 자살을 한 사건들에 관한 기사도 있었다. 공교롭게도 목숨을 끊은 두 모자 모두 ‘사회적 거리 두기’ 정책으로 인해 복지시설과 특수학교가 문을 닫아 집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다. 가족에게만 돌봄노동을 전가하는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기사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인터넷 신문사의 헤드라인은 K-방역을 극찬하고 있었다. 경제지에서는 코로나 시대에는 노동으로 돈을 벌 수 없다며 주식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재난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보편을 찾자는 희망찬 ‘뉴 노멀’이라는 단어도 곳곳에서 보였다. K-방역이라는 단어 앞에서 삭제된 개인의 헌신적인 노동과 새로운 보편을 꿈꿀 기회도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고 나는 노트북을 세게 닫았다.

 그리고 몇 달 뒤, 나는 희망했던 대학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고생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동생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다. 그러나 안도를 하는 동시에 무서워졌다. ‘동생이 복지시설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정도의 중증 장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모가 직장에서 계속 일할 수 있었다는 이유로 안도할 수 있는 나는 과연 더 큰 재난이 닥쳤을 때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열심히 노력하면 동생을 지킬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이 글은 <월간 유레카>에 실렸습니다. https://www.eurekaplus.co.kr/?NaPm=ct%3Dkluy8j1d%7Cci%3Dcheckout%7Ctr%3Dds%7Ctrx%3D%7Chk%3D0963a7ab0648436423b5eb7138b3617a549f82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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