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젠더 활동가들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다음 생에는 00로 태어나길'이라며 개인의 고통을 생물학적 확률 문제로 돌려버리는 워딩을 보면 화가 난다. 어떤 사람이 태어나도 환대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꾸기보다 개인이 사회에 순조롭게 적응하기를 장려하는 추모는 추모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뼈가 저릴 정도로 책임감을 느껴야만 한다.
그러나 '정상'에 속한다는 이유로 운 좋게 살아남았다는 것을 인지할 때 무기력에 빠지곤 한다는 것을 근래 실감하고 있다. 운이 좋았던 자신에 대한 자기혐오와, 피로와 회피 사이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고 있는 것만 같다. 문제는 자기혐오와 회피 둘다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문제는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앞에 놓여 있다. 내 능력으로 얻은 게 무엇이며 그 능력을 왜 발휘할 수 있었는지, 나는 왜 운이 좋았는지 끊임없이 고찰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