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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 May 31. 2019

불안해서, 산티아고 순례길 (2)

최종 학력 초졸, 대안학교 졸업생의 불안해서 떠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


한 바탕 웃자

나는 나의 실수에 정말 박한 사람이구나. 이번 여행을 통해 깨달았다. 여행은 역시 실수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외지에서 실수 없이 여행을 끝마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도 역시 실수를 많이 했다. 여행 내내 작성했던 ‘멍충 비용’ 메모장이 있었는데, 멍청한 실수를 할 때마다 지불한 비용을 적어놓은 곳이었다. 나중엔 세기 귀찮아 포기했지만, 약 50만원정도를 허공에 날린 것으로 추산했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하하, 여행은 실수의 연속이지"라 말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분개하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여행 도중 여권과 순례자 여권을 한 번에 잃어버렸다. 하필 여권을 버스 정류장도 없는 정말 작은 마을에 있는 알베르게에 두고 나왔고, 또 하필 그날은 25km를 걸은 뒤 다시 25km 정도를 버스를 이용해 점프한 날이었다. 여권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버스에서 내린 뒤, 대도시 레온에 있는 알베르게에서 체크인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여권도 여권이지만 매일 찍은 도장이 있는 순례자 여권을 잃어버려서 정신줄을 놓기 일보직전이었다. 이성을 붙잡고 경찰서에 가서 분실신고증을 작성했다. 경찰관들은 동양인 여자애가 난리법석 치는 것이 흥미로웠는지 친절하게 응대해주었다. 나는 여권이 없어졌다는 사실보다 이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영어로 된 서류를 작성하면서 두 세번 실수를 해버렸다. 모르는 단어가 많았고, 손이 떨려서 스펠링을 잘못 써버린 것이었다. 경찰 아저씨는 괜찮다며 서류를 다시 뽑아줬으나 나는 여권도 잃어버렸으면서 이거 하나도 못하는 나에 대한 분노를 감출 수가 없었다. 눈물을 똑똑 흘리면서 신고증을 받았고 다행히 숙소에서 잠을 잘 수는 있었다.



여권 잃어버린 줄 모르고 한가롭게 쉬는 모습

그날 저녁, 그토록 고대했던 중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밥이 입에 들어가는 지 코에 들어가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체 기가 돌았지만 맥주를 마시고 헤롱거리며 잠을 청했다. 다음 날에는 모처럼 점심까지 잠을 잤다. 프론트에 들려 하루 더 묵겠다 이야기하고 푹신한 이불 속에 들어가 어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생각했다. 갑자기 웃음보가 터졌다. 사는 게 재미있어졌다. 임시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다섯 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마드리드로 가야 했지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한 바탕 웃고 나니 앞으로 남은 여행 계획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마드리드에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번 여행 TOP 3,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그렇다고 그냥 웃어 넘기기에는

한 바탕 웃자. 나는 왜 이렇게 나에게 박한 걸까? 마을공동체에서 일을 하겠다 선언한 이후 답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활동은 공유경제 실험 활동으로, 학교를 다니며 배웠던 ‘굿워크’, ‘공존’, ‘기본소득’과 같은 키워드들을 직접 실현해볼 기회였다. 하고 싶은 일 하며 번 돈을 똑같이 나눈다는 당찬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을 가지고 다른 루트를 통해 돈을 벌겠다는 꿈은 현실과 부딪쳤다. 마을 공동체에서 안정적으로 임금노동을 하려면, 대부분은 고졸 이상의 학력을 필요로 했다. 정부와 내가 가장 기대했던 마을 사람들의 환대도 좀처럼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청년이 사는 마을', '대안학교 졸업생의 지속가능한 삶 모델' 어쩌고 한다. 하지만 정작 왜 나는 학력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5만원씩 적게 받아야 할까? 왜 우리는 어른들의 활동의 보조 활동가만 하고 있을까? 우리가 필요하긴 한 걸까?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할까? 친구들과 매일 모여 투덜거렸다. 투덜거림의 끝은 역시나 ‘내가 더 잘하면 돼’였다. 한 바탕 웃으면 내 탓을 그만 두게 될까? 다른 길이 열릴까?

막막하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걷는 것만큼 쉬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잘 하면, 내가 노력하면 되는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 물집이 잡혀도, 허리가 아파도 참기만 하면 완성되는 일만 생기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변하고 있다. 경제도 더이상 성장하지 않고, 경쟁이 일상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알아서 잘 살아남자'를 모토로 살아간다. 불합리함을 부수려 싸우는 사람들은 분노할 힘마저 잃고 있으며, 이들을 도와줄 사람들은 입만 둥둥 떠다니는 채로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 나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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