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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수돌 Aug 05. 2022

나만의 추모 방식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을 때 글을 써봅니다

7월에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았다.


나트랑을 여름휴가로 다녀오고 나서 밀린 업무도 잘 마무리하고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사이드 프로젝트들도 성공적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글도 쓰고 이런저런 벌려 놓은 일들을 잘 매듭짓고 싶었던 7월이었다.


그러나 미래는 참 속단할 수 없다고, 뭐든 해내고 싶었던 7월은 곧 가혹한 7월이 되었다. 휴가를 다녀오자마자 아버지의 컨디션이 갑자기 나빠져 오한과 발열로 한동안 고생을 하며 가족들의 애간장을 태웠다. 차라리 코로나였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원인 모를 병으로 며칠간 자리를 보전하셨다. 병원 약도 잘 듣지 않다가 결국 응급실을 가게 되었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한밤 중에 아버지를 모시고 어머니와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코로나 검사를 하고 침대를 배정받았다. 무기력하게 응급실 침대에 누워 계속 춥다고만 하시는 아빠를 바라보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 절망했다. 


의사 선생님은 장염 같아 보이지만, 그동안의 약들이 왜 차도가 없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셨다. 결국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를 한 끝에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고 수액을 맞은 후 퇴원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수액을 맞은 것이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그날 하루만큼은 아버지는 편안히 잠에 드실 수 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것


응급실을 다녀와서 한동안 치료를 한 덕에 아버지의 컨디션은 점차 회복되었다. 그러나 가혹한 7월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아버지가 다행히 기력을 회복할 때쯤 외숙모께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 지병이 있어 치료를 받고 있던 외삼촌이 갑작스레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50살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신 후 학업도 포기하고 자식처럼 동생들을 돌본 외삼촌이었다. 내게는 외할아버지를 대신하던 외삼촌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친척들 간의 왕래가 잠시 중단되기 전까지만 해도 명절뿐 아니라 휴일 때면 으레 같이 식사를 하던 가장 가까운 친척 어른이셨다. 


그런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것은 곧 내게는 외할아버지 같은 외삼촌을, 어머니께는 아버지 같은 큰 오빠를 잃었다는 의미였다.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슬픔에 잠겨 힘들어하셨다. 결혼을 앞두고 장례식장에 오면 안 된다는 집안 어르신들의 만류로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집을 지켜야 했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부모님의 모습이 유난히도 작고 슬퍼 보였다. 


또다시 찾아온 슬픔


장례를 마치고 외삼촌을 우리 집 근처 납골당에 모시고 나서 이제 한숨 돌리고 남은 7월이라도 잘 보내야겠다 싶은 차에 장례식을 다녀온 아버지가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이 때문에 또 외갓집 식구들에게 전화를 돌려 코로나 검사를 권유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고열에 시달렸지만, 처방받은 약을 드시곤 다행히 차도가 있어 회복하고 계시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또 갑자기 친척오빠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번에는 외숙모의 죽음이었다. 


가끔 너무나 서로를 사랑하는 부부들은 한쪽이 돌아가시면 남은 분도 곧 따라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진짜 그 일이 가까이서 일어날 줄은 몰랐다. 본인이 아픈 것도 참아가며 외삼촌의 병간호를 해왔던 외숙모마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버지와 나는 차마 어머니에게 어떤 위로도 건넬 수 없었다. 그저 울 뿐이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추모


결혼, 그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장례식장에 가서 두 분의 명복을 빌 수 없음이 애석했다. 그래서 글을 남기기로 했다. 행운의 럭키가 아니었던 가혹한 7월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 빠르게 휘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삶이 너무 치열해서 죽은 사람들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기억하기 어렵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떠나간 소중한 이에 대한 기억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나는 가슴에 묻는 대신 글자 하나하나에 묻으려 컴퓨터를 켰다. 


내 결혼식만큼은 건강한 모습으로 꼭 가보고 싶다고 하셨던 두 분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그분들을 글로서 추모할 수 있음에 감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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