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일본
비에이, 일본
때는 2018년 12월 말. 처음으로 삿포로로 혼자 여행을 떠났다. 교환학생 생활을 하며 제대로 된 여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고 크리스마스 연휴로 수업이 없었기에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눈이 보고싶다는 이유로 덜컥 삿포로행을 택한 것이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을 살펴 보고 숙소와 투어를 예약하며 설렘은 점점 커졌다. 정신없이 키치죠지에서 하네다 공항으로 가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도 혼자 여행을 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삿포로 공항에 발을 디디는 순간, 와 도착했다! 라고 함께 외칠 사람이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이 정말 이 곳에 나 혼자 왔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무서움이나 두려움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완벽한 설렘은 아닌 감정이 눈길을 걸을 때마다 조금씩 커졌다.
혼자 여행하는 게 무슨 큰 일인가 싶은 이들도 있겠으나 나를 아는 이들은 내가 얼마나 혼자 보내는 시간에 취약한지 잘 알고 있을 정도로 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혼자 쇼핑을 가겠다고 다짐하고 서울대입구역에서 홍대로 향하면 신도림역에서부터 이미 지루하다고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 정도라 친한 친구 중 하나는 나에게 you really have to work on it이라며 진지한 충고를 해주기도 했는데 그 때의 나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수업에 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고 매일 저녁은 과외와 동아리 혹은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가득했기에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애초에 많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늦은 밤 집에 돌아가 자기 전 혹은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가기 전까지, 그게 끝이었다. 도쿄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서울에서보다 분명히 늘긴 했지만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에 그리 지루함을 느끼지 않았고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과 기숙사 친구들과 어울리곤 했기에 완벽히 혼자 보낸 시간은 아니었다. 그런데 혼자 여행은 달랐다. 3박 4일의 시간을 오로지 나 혼자 보내야 했다.
역에서 숙소는 10분정도로 그리 멀지 않았지만 눈이 많이 내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고 눈길 위에서 바퀴 하나가 고장 난 캐리어를 끌고 가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힘든 일이었다. 한참을 걸려 겨우 도착한 숙소에 짐을 푸는데 같은 방을 쓰는 세 사람은 친구 사이인 중국인들이었다. 웃으며 중국어로 이야기하는 그들을 볼 때 처음으로 혼자 온 것이 서러워졌다.
눈 진짜 많이 오지 않냐?
와 개춥다
내가 왜 고장난 캐리어를 들고 왔을까
맛있는 거 먹고싶다
숙소 시설이 사진에서 본 것보다 별로다
그냥 이런 말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눈이 진짜 많이 오고 너무 너무 춥다고 같이 불평해 줄 사람. 그 후로도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 가는 길에 손을 잡고 걸어가는 커플을 봤을 때도, 혼자 앉아 얼굴이 빨개져서 맥주 시음을 하고 있을 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모녀가 맥주에 대한 평가를 하며 다음 일정을 짜는 것을 봤을 때도, 추워서인지 휴대폰이 갑자기 꺼졌을 때도 내 옆에 누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여행을 즐기고 있었음에도 마음 속에선 계속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 혼자가 아니었다면 더 재밌었을텐데.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투머치토커인 나에게 겨울의 삿포로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자주 눈보라가 쳐 카페에 들어가 혼자 핫초코를 홀짝여야했고 행여 배터리가 나갈까 휴대폰도 마음 편히 하지 못해 카페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일본어 대화로만 가득찬 카페에서 새하얀 창 밖을 바라볼 때 우습게도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마저 들었다.
다음 날, 예약한 비에이 투어의 만남 장소에 8시까지 도착해야 했는데 헤맬 것을 대비하여 일찍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길을 잃어 버스를 거의 놓칠 뻔 했다. 마지막 탑승객으로 숨을 고르며 버스에 올라 탔을 때 전체 버스에 딱 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자리에 앉는데 괜히 부끄러워졌다. 가이드 분의 말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였고 나를 포함해 일곱명 정도가 혼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과 말을 섞어 보지도 않았고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나 혼자 온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삿포로 시내에서 비에이로 향하는 세 시간 동안 태어나서 가장 많은 눈을 본 것 같다. 어딜 바라봐도 하얀 눈으로 가득했고, 겨울 삿포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왜 그렇게 많은지도 알 것 같았다.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가이드 분의 안내 멘트에 적막했던 버스 안이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짐을 챙겨 버스에서 내렸다. 한국에서 가져 온 이후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셀카봉도 까먹지 않고 챙겼다. 버스에서 내려 눈 밭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 눈을 처음 본 아이 마냥 신이 나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눈 밭에 경이로움마저 느껴졌다. 열심히 가이드 분을 따라 걸으며 첫 번째 목적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느라 바빠 보였으나 사진을 찍어 줄 사람도, 찍어 달라고 할 사람도 없어 어쩌다보니 가이드 분의 설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다른 여행 같았으면 친구들과 장난치고 사진 찍어주느라 바빴을텐데 설명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처음으로 혼자 여행하는 것의 특별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크리스마스 트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광활한 설원 위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나무 한 그루를 보러 1년에 1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방문한다고 한다. 무진장 특별한 나무도 아니고 주변에 볼 게 많은 것도 아닌데 다른 나무들과 멀찍이 떨어져 우뚝 서 있는 나무를 보러 150만 명이 온다니. 이 나무는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겠다 싶었으나 사유지라 가까이 갈 수 없고 멀리 떨어져서 지켜봐야 한다는 가이드 분의 말을 들으니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늘과 땅도 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눈으로 가득한 추운 곳에 혼자 몇 십, 몇 백 년을 서 있는 나무. 웃고 떠들며 인생사진을 남기느라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괜히 나무랑 유대감이 느껴져 가만히 서서 나무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평소였으면 그냥 멋진 풍경으로 기억 될 장소가 멋진 나무로 기억되는 것은 내가 혼자 여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셀카봉으로 내 사진은 찍지 않고 필름카메라로 나무의 사진을 한 장 찍어주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