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국
나는 애매한 사람이다. 뚜렷한 선호도 없고 특정 분야에 미쳐있는 덕후도 아니다. 좋아하는 색이나 캐릭터가 확실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예쁘고 귀엽다면 두루두루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나 노래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대답할 수도 없다. 너무 좋아 미쳐버리겠어서 5번 이상 본 영화도 없고 며칠동안 그 노래만 반복해 들을 수 있을만큼 좋아하는 노래도 없다. 좋아한다는 기준이 너무 빡센거 아냐? 하고 물을 수 있겠지만 내게 좋아한다는 것은 이정도 의미를 뜻한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해. 나에 대한 사실이지만 경계가 애매하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머글은 아니다. 그러기엔 마블 세계관을 줄줄 꿰고 있으며 일주일에 적어도 4편의 영화를 보고 각종 영화 리뷰를 읽고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렇다고 덕후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또 대답하기 어려워진다. 작은 예술 영화들은 잘 찾아보지 않으니까.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머글과 덕후 사이. 그 애매한 경계에 난 걸쳐져 있는 것 같다.
애매한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특출나게 잘 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학창시절에도 나는 공부를 곧잘 하는 상위권 학생이었지만 특출나게 잘 하는 과목이 있다기보단 모든 과목을 비슷하게 두루두루 잘 하는 편이었고 그 당시엔 이게 굉장한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구멍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과목에 비슷한 노력과 시간을 쏟으면 비슷하게 좋은 점수가 나왔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대학에서 모든 학생은 각자 전공이 있다. 그리고 그 전공을 공부한다. 전공 선택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이 좋아하거나 잘 하는 것을 전공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걸 살려야 취업을 할 때도 혹은 학점에 있어서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2016년 12월 18일, 많은 이에겐 그저 스쳐가는 하루 혹은 일년의 끝자락이었겠지만 이 날은 내게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짓는 운명의 날과 같았다. 수시 원서를 썼던 5개의 학교의 합불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친구들이 결과를 확인하는 것을 실시간으로 옆에서 지켜보며 왜 나는 하루에 다섯개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지 원망하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 너무 떨려서 차라리 하루에 내 운명이 결정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수험생이 활동하던 카페의 일원이던 나는 언제쯤 결과가 나올까 노심초사하며 기다렸고 부모님 앞에서는 덤덤한 척 했으나 속으로는 각 학교의 합격 가능성을 재며 나올 결과에 따른 수 백개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가 나왔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가장 면접을 잘 봐 합격을 확신했던 학교의 결과부터 확인해보았다. 합격 두 글자를 확인한 순간 속으로는 만세를 외쳤으나 티를 내지 않고 바로 다른 결과를 확인하였고 결과적으로 붙을 거라 예상했던 학교에 모두 합격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학교가 서울대였다. 원서를 쓸 때도 꼭 붙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써보자는 마음으로 써 보았고 면접도 다른 학교에 비해 뛰어나게 잘 봤다는 느낌이 없어 큰 기대를 하지 않았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결과를 확인했다.
합격
글자를 본 순간 너무 놀라 창을 닫아버렸고 그제서야 소파에 앉아 있던 나는 앞에서 웃으며 텔레비전을 보고 계시던 부모님께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었다. 결과를 확인할 때도 담담했던 나인데 결과를 확인하고 부모님께 보여드리려니 손이 덜덜 떨려 엄마는 웃으셨고 그 때 나도 내가 얼마나 멀쩡한 척 하려고 노력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서울대에 합격한 순간 나는 이제 모든게 술술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대학 생활도, 취직도, 연애도 그리고 다른 것들도 모두 큰 어려움 없이 해낼 거라 생각했다. 그 순간으로부터 3년 반이 지난 지금, 놀랍게도 나는 아직도 헤매고 있다. 대학생이 되면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배우고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갈래! 라고 말하곤 했으나 실제 행동으로 옮긴 것은 얼마 되지 않고,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실제로 옮기지 않는 나의 태도에 친구들은 '말만충'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하나씩 실천하는 법을 배우고 있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좋아하는 것도 너무 많아 방황하는 중이다.
흔히 대2병이라고 하던데 나는 도쿄에 다녀와서인지 그 대2병이 3학년이 되었음에도 남아있었다. 2019년 3월의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진로 얘기로 한숨을 푹푹 쉬고 여전히 전공에 확신이 없어 고민하고 반 년만에 돌아온 캠퍼스에 다시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미대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 예전처럼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은 후 돌아가는 길에 커다란 벚꽃 나무와 푸른 하늘을 봤는데 갑자기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내가 잘 아는 곳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벚꽃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이걸 깨달은 순간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렀고 그 결과 좋아하는 것들만 나온 사진 한 장을 얻게 되었다. 아직도 나는 취향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인 애매한 사람이지만 누군가 나에게 뭘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적어도 두 가지는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벚꽃과 푸른 하늘! 그리고 이 모든 걸 갖춘 봄의 캠퍼스! 올해 봄에는 외국에 있어 이를 보지 못했지만 내년 봄에는 부디 캠퍼스에 다시 갈 수 있기를.
미대에서 경영대로 가는 길에 있는 벚꽃 나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