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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베트남 한국마트 알바 적응기

알바 출근 첫날, 분위기가 왜 이래!

by 반쯤 사이공니즈

대학생이 되어 한국 마트에서

첫 알바를 하게 되었다.


보통 한국 식당이나 마트에서는 한국 최저시급 기준으로 급여를 책정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난한 대학생 신분에게는 베트남 물가를 고려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일주일 중 6일, 오후 5시부터 밤 11시 마감까지 매일 일했고 한 달에 1-2번 정도 쉴 수 있었다.

당시 학업과 병행하면서 매일을 출퇴근했던 날들을 돌이켜보면 정말 젊은 나이의 체력이란 게 대단하다 느껴진다. 실제로 당시 몸무게가 47-48킬로까지 자연스럽게 빠졌으며 밤새 과제를 하느라 눈이 항상 퀭했다. 그럼에도 내가 1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가족처럼 친해진 직원언니 아저씨들과의 시간이 행복했고 성취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텃세? 경계?


하지만 처음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해내는 아주 오래된 왕고 베트남 직원 언니들이 각 지점마다 호랑이처럼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베트남 직원들도 무서워했다. 한국 사장님과 의사소통이 되며, 전화로 주문을 받을 수 있고, 정산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근무연수가 10년이 넘어가는 파워가 막강한 관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왕고 언니들을 중심으로 직원들의 서열이 확실했다.


내가 그 한국 마트의 첫 한국인 아르바이트생이었는데, 딱히 한국인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내가 들어갔을 때 베트남 직원들 그 누구도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나의 고용에 의문이나 불만을 품은 직원들도 꽤나 있었다.

첫 출근 날, 사장님은 소개해주시곤 날 매장에 넣어두고 사라지셨다. 당연히 첫날에는 그저 멀뚱하게 서서 오는 손님들에게 '어서 오세요'와 '안녕히 가세요'를 연발할 뿐이었다. 내가 계속 뻘쭘하게 계속 서 있자, 한 명이 의자를 주었고 이틀째가 되자 그들의 경계는 호기심으로 서서히 변했다.


내가 잔뜩 긴장하고 있다가, 손님이 "이거 어디 있어요?"라고 물어보는 말을 듣고 튀어나가는 바람에 의자에 걸려 요란하게 넘어질 뻔했다. 뻘쭘하게 손님에게 물건 위치를 알려드리고 나니, 지켜보던 다른 직원들이 나의 어설픈 행동을 보고 한 명씩 웃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순간이었지만, 모든 경계가 무너지며 내가 들어갈 틈이 생겨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어설프지만 베트남어를 곧잘 하는 나를 신기해하며 모두 마음을 열어주었고, 내가 오기 전 차갑고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도 천천히 풀려나갔다.

한국 마트니깐!

나는 한국인이니깐!

쉬울 거야! 라는 착각


아니 한국마트이고, 나는 한국인이니깐 쉽게 일을 할 수 있으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오만은 너무나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배워야 하고 외워야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수의 종류와 크기, 박스에 몇 개가 들었으며 고추장의 브랜드와 작은 것 큰 것의 그램수, 매일매일 다른 고기, 생선, 야채와 같은 신선식품들의 재고와 상태를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처음에는 왕고언니가 전화 주문받는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배웠는데, 거의 경지에 다다른 수준으로 내가 저걸 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모든 것이 암묵적인 룰과 체계아래 척척 진행되어 나갔다.


왕고언니는 전화를 받아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네"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답하며, "없어요", "작은 거요? 큰 거요?" 혹은 "손두부요? 순두부요?" 등을 빠른 속도로 확인하며 주문을 적어내려 갔다. 전화를 받으면 2분을 넘기지 않고 끊었다. 대부분 주문들은 주변 아파트였는데, 각 아파트마다 동과 호수의 배열까지 외워 손님이 주소를 맞게 주는지도 동시에 판단해 냈다.

그러고는 전화를 끊자마자 큰소리로 "손두부 1개, 대파 1개, 아쿠아피나 작은 거 1박스!!!"라고 베트남어로 외쳤다. 밑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Da! (네)"를 외치면서 2층의 신선코너에서 제품을 가지러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다른 직원에서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팔을 뻗어 주문지를 건네주어 나머지 제품을 픽업해오게 했다.


직원들이 종이를 보고 가져오지 못하는 한국어로 적힌 제품들은 왕고언니가 직접 나가서 가져왔다. 그렇게 한 바구니에 척척 담아 넣고는 캐셔가 바코드를 찍고 영수증을 뽑았고, 영수증 뒷면에 아파트 이름과 동, 호수 그리고 핸드폰 번호를 적어 넣고, 잔돈도 함께 봉투에 넣었다.


그러고 띵동 벨을 누르면, 밖에서 대기하던 배달 아저씨들이 들어와서 봉투에서 영수증과 잔돈 주소를 확인하고는 배달을 떠났다. 이 모든 프로세스가 주문과 동시에 15분-20분 안에 일어난다. 아마 배달은 30분 이내 혹은 더 빠른 시간에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포기하긴 이르다!


일단, 잘 모르는 채소와 신선식품들을 베트남어로 외우기 위해서 단어표를 만들어서 뽑아왔다. 그러고 나만의 루틴을 만들었다. 출근하자마자, 2층에 있는 신선식품들의 재고를 종이에 적었고, 1층과 2층을 매일 돌아다니며 제품들을 눈에 익혔고, 특별히 알아두어야 하는 재고가 떨어진 제품들도 스캔했다. 그리고 아직 배달이 안 간 것들의 봉지도 열어보며 파악해 두었다.


내가 주문전화를 받기 시작하자, 몇몇 손님들이 목소리를 듣고 한국사람이냐고 알아차리기 시작하셨다. 이전에 소통이 제한적이었던 게 아쉬웠다고 반가워하셨다. 자주 주문하는 단골손님들의 전화번호 뒷자리만 봐도 주소를 알 정도로 나는 어설프지만 서서히 적응해 나갔다. 3개월쯤 접어들자, 가게를 지키던 왕고언니는 이제 나에게 완전히 가게를 맡기고 다른 지점으로 갔다.

가게는 퇴근시간쯤에 맞춰서 엄청나게 바빴는데, 방문하는 손님도 전화주문하는 손님도 폭풍처럼 몰아쳤다. 나는 약간 상황을 정리하고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라서 마치 타이푼게임을 하는 것처럼 성취감을 느꼈다. 일을 하는 게 재미있었고, 같이 일하는 언니, 아저씨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너무 즐거웠다.


아르바이트비도 베트남 물가에 비하면 굉장히 많은 금액이었기에, 돈을 잘 아끼고 모아서 내 첫 노트북과 오토바이를 살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나의 첫 사회 진출이었다고 볼 수 있던 그 시기는 알바이상의 경험으로 기억으로 남아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하면서 많은 일이 있었는데, 다양한 진상 손님들 그리고 내가 17년간 베트남에 살면서 본 가장 잘생긴 경비에 대해서 다음 글에서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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