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치민의 일 년 중 절반은 비가 온다

베트남에서 일기예보를 잘 안 보는 이유

by 반쯤 사이공니즈

어제 밤새 번개가 쉴 틈 없이 하늘을 울리고, 잠들기 어려울 정도로 어수선한 소리를 내며 폭우가 쏟아졌다. 태풍 갈매기가 베트남 중부지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 들어 벌써 4번째 태풍이다.


북부 하노이 근처 지역의 큰 피해를 입힌 태풍이 지나가고, 바로 또 큰 태풍 하나가 중부지방을 강타한 참이다. 다낭과 그 주변지역이 침수되어 안타까운 인명피해까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이미 필리핀에서 60여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일으킨 거대한 태풍 갈매기가 또다시 중부지방으로 오고 있다고 한다. 올해 잦은 폭우와 태풍 피해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호치민도 직접적인 영향권은 아니었지만, 연달아 지나간 태풍들과 만조의 영향으로 물이 차오르는 지역이 늘어났다. 올해의 우기는 유독 길고 거칠게 느껴진다.


베트남의 땅덩어리는 정말 길다. 북쪽에 있는 하노이에서 남쪽에 있는 호치민까지는 기차나 버스를 타고 하루하고도 반나절은 쉬지 않고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그렇기 때문에 하노이와 호치민의 계절은 정말 다르다. 하노이는 기온차가 크기 않지만 4계절이 있는 반면, 호치민은 건기와 우기로 일 년이 나뉜다.


대략 건기는 11월부터 4월이고, 5월부터 10월까지는 우기로 구분한다. 호치민은 친구들 사이에서 'very hot 시즌'과 'fuxking hot 시즌'이라는 두 시즌으로 나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런 호치민에서 15년쯤 살고 있으니, 그저 비가 슬슬 오기 시작하면 '우기가 왔구나',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더우면 '건기가 왔구나' 하고 눈치껏 알아차리기에 계절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 일상을 살아왔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그때가 추웠을 때니깐, 12월쯤 이었을 거야."라는 계절감각이 포함된 기억을 더듬을 때는 부러우면서도 다름을 느낀다.


[ 우기 ]

베트남에서는 일기예보를

잘 보지 않는다.


맞지도 않을뿐더러 지역마다 차이가 너무 크고, 우기동안은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비가 오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평균적으로 비는 오후에 많이 내린다. 오후 1-3시쯤 비가 가장 많이 내리고, 다음으로는 퇴근시간에 맞춰 비가 내리는 경우가 많다. 다만 태풍의 영향을 받을 때는 주로 늦은 밤부터 이른 오전시간까지 비가 내리는 경우가 있다.


베트남살이 10년이 넘어가니, 비가 올 징조를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맑고 쨍한 하늘을 보면서도 '오후에 비가 많이 오겠군'이라고 읊조릴 정도가 된 것이다. 동남아의 스콜은 하늘이 어두워졌지만 비가 안 오는 경우도 많고, 이곳에선 비가 오지만 저곳에서는 비가 오지 않기도 하는 예측불허한 놈이다.


그래서 우기에는 오토바이 트렁크에 항상 비상용 쫄이와 우비를 넣고 다녀야 한다. 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오토바이들은 멈추지 않는다. 베트남사람들은 비를 감각으로 판단하는데, 이 비가 오랫동안 많이 쏟아질지, 잠시 스쳐 지나가는지, 아님 이 지역만 벗어나면 피할 수 있는 비인지를 본능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우비를 쓰는 일은 생각보다 더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방을 안으로 메서 거북이같은 모습

비가 심상치 않게 굵어지고 쏟아지기 시작한 뒤에서야 사람들이 급하게 갓길에 오토바이를 댄다. 그러고는 트렁크를 열어 우비를 꺼내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헬멧을 벗고 우비에 머리를 집어넣어 입고, 가방을 우비 안으로 숨기고 그위로 다시 헬멧을 쓴다. 물론 아주 심한 폭우가 쏟아질 경우 위험하기 때문에 처마 밑에서 비를 잠시 피하고 가지만, 웬만한 빗줄기는 뚫고 달린다.


우비를 써도 젖는 건 똑같다. 그래서 나도 출퇴근길에 비에 흠뻑 젖은 적이 수두룩하지만, 가장 싫었던 건 만조와 폭우 타이밍이 겹쳤을 때다. 딱 퇴근시간인 오후 5-6시쯤 물이 차올라 도로가 잠긴다. 퇴근시간이라 길까지 막히면 물이 차오른 도로를 시속 15km 이내로 서행하며 발을 바닥에 내리지 않고 지나가야 한다. 느린 속도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길을 가르며 중심을 잡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중간에 멈추면 발을 차오른 물속으로 담가야 하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들의 뜨거운 엔진이 물속에 잠기며 연기를 낸다. 옆에는 바지를 무릎까지 걷고 멈춰버린 오토바이를 끌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내 오토바이도 멈춰버리진 않을지 심장을 조였다. 물길을 해치는 우기의 퇴근길은 험난했다.


[ 건기 ]

그렇다면 건기는

비가 안 오니깐 좋을까?


놀랍게도 비가 제발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뜨겁다 못해 따가운 날들이 이어진다. 그래, 우기는 그나마 비가 한바탕 쏟아지고 나면 시원하기라도 했다. 하지만 건기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한다. 건기 중에서도 가장 뜨거울 때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선 두꺼운 겉옷과 장갑, 마스크 그리고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 아스팔트 위로 내려 꽂히는 햇빛은 체내수분까지 쫙 뺏어가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습도는 높은 편은 아니라서, 이런 미칠듯한 더위에서도 그늘에만 들어가면 한숨을 돌릴 수 있다.


이런 호치민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초가을 같은 선선함이 찾아오는 시기가 있는데, 우기가 막 끝나고 새해를 앞둔 짧은 1-2달간의 기간이다. 지긋지긋했던 우기도 끝이 나고,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느라 들뜬 분위기에 선선한 날씨까지 합해져 가장 가슴 설레는 시기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면 쌀쌀하다라고 느낄 정도라서 밤에 잘 때도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도 끄고 자야 할 때가 간혹 있다. 추워졌다고 호들갑을 떨며 가장 두툼한 이불을 꺼내 덮으며 "어휴, 요즘은 솜이불 덮어야 해!"라고 말하는 게 내 베트남살이 낙 중 하나다.

호치민은 메콩강 삼각주 지역으로 풍부한 물, 비옥한 토양으로 "축복받은 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불만을 한가득 쏟아냈지만, 호찌민의 날씨는 살기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더워도 중동만큼 덥진 않고, 비가 와도 짧고 굵게 내리고, 1년 365일 충분한 햇빛 공급까지 되는 곳이다.


하지만 어릴 때 동상이 걸리도록 눈 속에서 뛰어놀 정도로 겨울을 좋아했던 나는 한국의 선선한 가을이, 시린 겨울이 너무 그립다. 호치민에서 좋은 기후를 누리며 살고 있지만 길어지는 우기의 끝에서 태풍이 그만 피해를 입혔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배부른 투정을 해본다.

keyword